① 서예가 이상복… 생애와 예술(1929. 4. 26. ~ 1995. 12. 13.)

초임지 문의초교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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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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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중요기관 현판 글씨의 주인공

충청북도청 정문의 육중한 돌기둥에는 녹색 바탕에 금빛 돌출글씨로 ‘충청북도청’이라고 씌어있다. 충청북도청임을 알리는 현판이다. 충청북도교육청의 정문에도 녹색바탕에 돌출된 금빛 글씨로 ‘충청북도교육청’이라는 글씨가 있다. 이곳의 글씨는 충청북도청의 현판과는 조금 다른 ‘예서체’이다. 발을 옮겨 청주시청으로 가보면, 이곳 역시 ‘청주시청’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 글씨들은 누가 쓴 것일까.

충북도청 현판.
충북도청 현판.

 

이 기관들 외에도 청주대학교, 충북체육관, 충북체육회관, 청주종합운동장 등 청주시내의 중요한 기관에서 같은 글씨체의 현판들을 만날 수 있다. 이 현판들은 모두 서예가 우송 이상복(又松, 愚松 李相馥 1929.4.26.~1995.12.13. 음.10.21.)의 붓끝에서 나왔다. 이 뿐이 아니다. 청주시 상당공원에 있는 충청북도도민헌장, 삼일공원 민족대표6인기념비, 청주 중앙공원의 한봉수송공비, 여주 영릉비, 강감찬장군비, 송강 정철사적비, 김시민장군기념비. 임경업장군 유적정화비, 김유신장군사적비, 단재 신채호사적비 등 충청북도를 비롯한 곳곳에 산재한 60여 개의 기념비에서 그의 글씨를 만날 수 있다. 그 글씨들은 한결같이 기품이 배어나오는 듯 아정(雅正)하고 세련됐다.

이상복.
이상복.

 

글씨의 주인공인 우송 이상복. 그는 충북 서예계의 큰 어른이었다. 서예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자신의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 평생 번듯한 개인 작업실조차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죽기 사흘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글씨 쓰는 일은 밥을 먹는 일처럼 일상이었다.



제자들이 유묵전 열고 ‘우송 서예상’ 제정

그가 떠난 지 27년이 되던 2022년 10월 25일, 그를 흠모하는 제자들(오신택, 이영호, 장학진, 김재규, 맹찬균, 오윤복, 백승면)이 중심이 되어 스승의 유묵전(遺墨展)을 열고 작품집을 만들었다. 유묵전을 제안하고 주관한 충북서가협회장 장학진은 전시준비를 위해 2년여에 걸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스승의 작품들을 모으러 다녔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해 국전입상 작품을 촬영해오고, 기념비, 유적비, 현판, 편액 등 스승의 흔적이 있는 작품을 찾아 촬영을 하고 다녔다.

충북도교육청 현판
충북도교육청 현판

 

“선생님 작품을 마주할 땐 으레 두 손을 모으고 목례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고희가 되면 개인전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고희가 되기 전 67세에 세상을 뜨셨어요. 선생님 살아생전에 전시회를 못열어 드리고 돌아가신 뒤 유고전을 열며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한번은 어느 사당에 선생님 편액이 걸려 있다하여 사다리를 차에 싣고 찾아갔더니 문이 잠겨 있었어요. 할 수 없이 사당 담을 넘어가 사진을 찍고 나오다가 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던 적도 있었지요. 한참 만에 정신이 들었는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검색부터 했지요. 다행히 선생님 작품 사진이 찍혀 있어서 안도를 했던 적도 있었어요.” 장학진의 말이다.

청주시청 현판
청주시청 현판

 

제자들은 스승의 글씨를 새긴 서예비를 세우고 싶었다. 평생 남의 비에 글씨를 써준 스승이었다. 스승을 위한 비 하나쯤은 남겨드리는 것이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뜻을 전해들은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보내 금세 1200만원이 모아졌다. 스승의 묘소가 건너다 보이는 문화재단지나, 단재 신채호의 비를 쓰신 스승이니 단재 동상 옆에 쯤 세워드리고 싶어 청주시에 수없이 서류를 보내고 요청하였으나 조례에 없다며 ‘불허’통보를 받았다. 비를 세워드릴 땅 한 뙈기를 얻지 못해 속이 상했던 제자들은 대신 이상복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우송 서예상’을 만들었다. 우송 서예상을 통해 충북 서예의 ‘별’이었던 스승 이상복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고 빛나길 바라는 뜻에서였다.



시암 배길기와 사제지간 인연

이상복은 청주시 문의면 문산리 선비의 가정에서 출생해 6세 때부터 아버지 노송(老松) 이승우로부터 직접 한학과 글씨를 배웠다. 집에는 한학자인 할아버지가 쓴 서첩과 아버지가 쓴 서첩이 있어서 서첩을 교과서처럼 여기고 공부를 했다. 아버지로부터 “글씨는 기교가 아니라 선비정신을 가르치는 공부”이라고 배웠다. 그가 호를 우송(又松)이라고 지은 것은 아버지의 호가 노송(老松)이라서 노송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또다시 소나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후에 ‘어리석을 우’를 이용해 가끔씩 우송(愚松)이라고도 썼다.

청주상고 2학년 시절.
청주상고 2학년 시절.

 

이상복은 남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상업학교로 진학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회사를 다녔지만 맞지 않아서 그만두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데, 신약호 문의초등학교 교장이 교직을 권했다. 아버지도 흔쾌히 동의를 해서 1947년 교사자격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을 했다. 그리고 고향인 문의초등학교의 교사가 됐다. 몇 년 뒤인 1956년엔 중등교사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했는데, 시험장에서 그의 서예인생의 ‘나침반’이 될 한국현대서예가 1세대인 ‘전서(篆書)의 대가’ 시암 배길기(是菴 裵吉基, 1917~1999)를 만난다. 당시 서울대 강사였던 시암이 시험감독으로 들어온 것이다. 시암은 그날 이상복을 삼청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시암은 우연히 이상복 글씨를 보고 글씨가 맑고 힘차서 수소문했더니 충북에서 교사로 있다고 들었는데 만나게 되었다고 반가워했다. 이상복은 그렇게 인연이 된 시암을 사사(師事)한다. 물론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사제지간으로 맺은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몇 년 동안 시암은 이상복에게 여러 일을 시켰다. ‘사람시험’을 본 것이다. 시암과 만나면서 이상복이 깨달은 것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실해야 글씨가 제대로 나온다는 평범한 깨침이 체득되자 그제서 시암은 사제의 연을 맺었다. 스승은 “인성이 좋아야 옳게 배운다. 인성이 나쁘면 글에 교(巧)를 부리니 바른 인성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복은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

시암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제자를 둔 대가였다.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최연소 예술원회원, 1965년 서예가협회 초대회장, 1958년부터 동국대 교수로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를 비롯, 한글·전각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연구한 실력자였다. 그런 그가 이상복에 대해서 갖는 아낌은 특별했다. 경남 김해출신인 시암은 자신이 죽으면 충북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복을 특별히 믿어서였다. 차가 없는 이상복의 곁에서 수족처럼 모시고 다녔다는 제자 이영호는 “선생님은 병중이시면서도 괴산 옥천 영동 등 시암 스승님을 위한 좋은 묘자리를 보러 다니셨어요. 두 분의 관계는 현시대에서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사제간의 진정한 본보기가 아닐까 싶어요”라며 “시암 선생이 괴산 땅으로 오시는 것도 보지 못하고 우송 선생님이 먼저 가셨다”며 애통해 했다. 시암 배길기는 이상복이 떠난지 4년 후인 1999년, 이상복이 추천한 괴산 땅 괴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에 묻혔다.

 

이상복
이상복

 

눈물의 사은전시회

서예인생 60년을 맞는 1995년 3월, 이상복은 동양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1995. 3.29. ‘사람풍경’) 평소 갖고 있던 스승 시암에 대한 존경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60여 년 서예인생이 거둔 가장 소중한 결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이 또 중요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깊은 것이 제 일생의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당시 그는 병중이었다. 전 해에 신장염이 발병해 진천상고에서 정년퇴임하는 날에도 병원에 있었다. 진단결과 대동맥이 막히는 혈전과 심장이상 등이 발견돼 4시간30분에 걸친 수술 끝에 퇴원을 했다.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게 나왔는데, 소식을 들은 시암이 백만 원을 선뜻 보내왔다. 시암도 위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에 누워있을 때였다. 제자들도 알음알음 여기저기서 병원비를 보내왔다.

이상복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제자들은 스승의 퇴원을 축하해 학생문화원(청주기계공고옆)에서 ‘사은 서예전’을 마련했다. 퇴원은 했지만 오른 발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야 했던 이상복은 전시회 오픈날인 3월 25일 휠체어를 탄 채 참석했다. 전시실에는 제자들이 업고 들어섰다. 그런 몸으로 이상복은 화선지 위에 앉아 몸을 끌며 답시를 썼다. 환자의 글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힘차고 기개 넘치는 달필이었다.

그런데 그 서예전에 시암이 팔순 노구를 이끌고 찾아왔다. 시암은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제자와 또 그의 제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감동의 ‘사은 서예전’이었다. 그날 ‘사은 서예전’ 자리에서 조건상 박사(전 충북대 총장)는 우송 이상복에게 다음과 같은 헌시를 선사했다.

“서원(청주)에는 놀랄 일이 많은데 이에 우송의 문필의 아름다움을 첨가할 수 있네....세간 부귀가 허무한 일인데 우송이 지켜온 예도는 그것이 만대까지 이름 떨칠 수 있는 꽃다운 이름이다.” -漢詩 일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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