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동양일보]대승을 예상했던 지난 토요일의 아시안컵 요르단전 2대2 무승부에 속이 상하고, 북극 한파가 몰고 온 강추위에 마음마저 얼어붙는데, 지난 주말 저녁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이 터져 나온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의 갈등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21일 오후, 대통령실에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 비대위원장은 “국민 보고 나선 길, 할 일 하겠다”라는 입장을 기자단에게 공지했고, 대통령실은 “비대위원장의 거취 문제는 용산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한 비대위원장은 월요일 물러날 뜻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실히 했고 대통령실에는 비상이 걸린 모양새다.

대통령실은 한 비대위원장이 시스템 공천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왔음을 사퇴 요구의 근거라 했으나 이는 표면적 이유일 뿐, 실제로는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과 관련하여 한 비대위원장이 최근 보여준 미묘한 입장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게다가 김경율 비대위원이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거론하며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강력히 요구하고 한 비대위원장이 김 비대위원의 서울 마포을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대통령의 심기가 매우 거북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한동훈 법무장관을 비상대책위원장에 앉힌 지 채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무슨 사퇴 요구란 말인가? 국민의힘 대표경선에 나섰던 다수의 사람을 눌러 앉히고 김기현 대표를 선출시킨 지 아홉 달 만에 다시 김 대표를 억지로 끌어내리고 한동훈 장관을 비상대책위원장에 앉힌 것이 모두 대통령 뜻이었음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가 됐든 이제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하여 채 한 달도 안 된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다. 113명 국회의원의 집권여당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사조직이 아니며, 대통령의 심기에 따라 대표가 오르고 내리는 꼭두각시 정당도 아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어느 나라 군주가 집권여당을 이리 대할 수 있겠는가? 북한처럼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원희룡 전장관의 인천 계양을 출마, 김경율 비대위원의 서울 마포을 출마를 공식화한 것은 분명 시스템 공천에 어긋나는 처사이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한 비대위원장이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시스템 공천의 원칙에 맞도록 바로잡으면 될 것을 대통령실이 나서서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천(私薦)’이라고 몰아붙이며 한 비대위원장을 끌어내리려는 모습은 구차하기까지 하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 한 비대위원장이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라거나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한 것은 총선을 앞둔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못할 말은 아니다. 다만 한 비대위원장 발언 이전에 김경율 비대위원이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거론한 것은 적절치 못한 비유였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이 기획된 ‘몰카 정치공작’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이미 고발되어 사법적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몰카 정치공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명품백을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은 확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국민은 왜 우리나라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그걸 받았느냐고 묻고 있다. 김건희 여사는 ‘몰카 정치공작’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명품백의 수령인이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진솔한 입장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총선을 80일 앞두고 여당은 ‘김건희 여사 리스크’로, 야당은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로 진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반성하고 고치기는커녕 서로를 물어뜯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아수라장 한복판에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한 사퇴 요구가 터져 나왔다. 대단히 잘못된 처사이며 대통령실은 책임지고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일들이 정녕 대통령의 뜻인지, 아니면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과잉 충성의 결과인지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어이없는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지난 주말 저녁의 한바탕 촌극이었으면 좋겠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