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동양일보]복숭아꽃이 피었다. 2천5백 평의 너른 밭이 온통 연분홍빛으로 아련하다. 다섯 개 꽃받침을 딛고 핀 복숭아꽃은 막 초경을 치른 소녀의 맨살처럼 곱고 여리다. 게다가 비릿한 향이 에로틱하다. 그러해서였을까.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연과 함께 복숭아 꽃밭을 거닐었던 꿈의 판타지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 궁중화가 안견을 불러 ‘몽유도원’을 그려보라고 했다. 화가는 대군의 꿈속 스토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3일이 걸렸다. 선계를 연상시키는 깊고 높은 산과 골짜기 안에 집 두채 정갈하게 앉혔다. 그리곤 집 앞으로 수십 그루 복숭나무 가지마다 꽃을 피운 ‘몽유도원도’는 당시 엘리트 문사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에 가까울 뿐, 땀 냄새와 노동의 역동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안견의 그림 중 으뜸으로 치는 이 작품은 일본 ‘텐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과수원 농사는 몸으로 하는 기도다. 사과 한 알도 복숭아 한 알도 농부의 땀과 정성이 배어 있다. 눈썹에 성애가 달라붙는 한겨울에도 전지가위를 들고 웃자란 가지를 쳐 주고, 턱없이 세를 불린 곁가지도 쳐내고 퇴비를 뿌리고 병충해 방지도 미리 해 줘야 한다.
김기식 씨는 3대 째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대학에서 ‘응급구조학과’ 4년제를 졸업하고 소방서에 근무하던 그를 부친이 집으로 소환시킨 것은 8년 전이다. 젊은 날 당신이 동서커피회사에 근무하다 선친의 부름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과수원지기로 살아온 과정을 아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대물림시켰던 것이다.
기식 씨는 부친이 조부의 부름에 순순히 응하였듯 자신도 군말 보태지 않고 부모님 뜻을 따랐다. 부친은 일찍이 조부에게 물려받은 과수원 5천 평이 성에 차지 않아 야산 1만 평을 개간하고 일본에서 신품종을 사다 심었다. 조부가 1970년대 초에 홍옥이란 재래종을 버리고 ‘부사’란 신품종으로 성공을 거두었듯이, 그의 아버지도 일본에서 개량한 다양한 품종을 수입해 심었다. 계절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아오리, 홍로, 시나노골드, 그리고 서리 내린 후에 따는 ‘후지’로 나누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신인류의 목숨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듯 과수원에도 때를 같이하여 화상병이란 바이러스가 번졌다. 1만 평에 심어 놓은 30년생 사과나무가 잎이 마르면서 선채로 말라죽었다. 참혹한 사건이었다. 젊은 날 아버지가 소신공양하듯 받들어 키운 30년생 사과나무가 대형포클레인의 삽자루에 뽑혀 몸통이 잘리고 뿌리는 땅에 깊이 파묻히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청년은 절망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아직도 고시촌에서 10년씩 취준생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걸 잘 아는 터라 아버지가 제 몫으로 떼어준 2천 5백 평에 심어 놓은 복숭아 농사만으로도 공무원 연봉보다는 높은 수익금을 올릴 수 있음을 자신하고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땀을 쏟고 공을 들였다. 복숭아 농사는 공들인 만큼 성과는 만족했다. 5년 동안 복숭아밭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밭 1천 평을 구입하고 그 밭에도 복숭아나무를 심어 내년부터는 3천 5백 평에서 수확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련의 아픔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는 동기가 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연분홍 복숭아꽃은 노을의 프리즘과 섞여 고혹적으로 변한다. 저 고혹적인 복숭아꽃이 열매의 탄생을 꿈꾸는 지금은 복숭아꽃이 세상의 중심이다. 바람도 꽃의 숨결이 고와 몸을 낮추고 사뿐사뿐 안단테로 지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