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문학평론가
[동양일보]북촌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남산 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정지용이 일요일이면 스케치북을 들고 ‘재동’에서부터 걸어갔다는 남산이다. 남산에서 한강도 조망하였다고 한다. 순이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남산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다들 걸어갔지 않았을까?”
물음표로 물어본 질문은 다시 물음표가 되어 되돌아왔다.
“우리 저기 가보자.”
“그래.”
남산에 도착했다.
한강이 보였다.
정지용은 이곳에 올라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하였겠구나. 그러면서 예술적 혼이 강하게 자극되었을 것이고 그 자극은 시적 감흥으로 자라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가 되었겠구나.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하나, 둘 별빛처럼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야경이 홍콩 야경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던 필자였기에 그 감흥이 더욱 각별하였다. 하물며 정지용 선생님을 생각하니 한껏 운치 있는 풍경이 그려졌다.
이렇게 특별한 날, 시시한 칼국수를 먹고 옥천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때 심정이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순이야 맥주 먹을까?”
“그래, 먹자.”
300CC의 수제 맥주 2잔이 제법 그럴싸한 잔에 담겨서 나왔다.
정지용이 좋아했다는 맥주. 길진섭과 평양에 갔을 때 맥줏집에 들어가서 맥주 몇 병 주면 되겠느냐는 여급의 말에 있는 대로 다 가져오라고 하였다던 정지용의 호기를 생각한다.
정지용은 이렇게 여유로운 호기를 부렸다지만 똑똑하지도 탐탁하지도 못한 필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치 정도의 삶을 살아가면서 정지용에 대한 의문만 키우고 있는 얼치기는 아닌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정지용 고향 옥천을, 「삼인」에서 정지용이 친구 2명과 함께 옥천으로 가던 과정을 거쳐서 가야 하나. 조선시대, 1919년 정지용은 남대문(서울)역에서 용산역을 거쳐 한강을 지나서 옥천에 갔단다. 그런데 현대에 사는 필자는 수서역에 가서 SRT를 탄다. 그렇기에 용산이나 한강을 지나지 않는다. 다만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땅속으로 길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그때 정지용은 조명만이 배웅하는, 땅속 풍경이 빛을 발하는, 현대의 상황을 짐작이나 하였을까.
정지용의 휘문고보 시절 하숙집이었다는 “齋골 막바지 山밋 조고만 초가집”은 찾지 못하였다. 다만 어디쯤인지 지레짐작한 곳은 있다.
정지용을 향한 미제(謎題)의 단서를 찾아다니는 얼치기는 그의 행적을 가늠만 하며 또 하루를 보냈다. 그 가늠은 섣달그믐 재동 날씨처럼 혹독하다. 언제쯤이면 야물어질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