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수 유자차스튜디오·원더러스트 대표
운천동 동네기록관인 라이트하우스는 청주에 있는 동네기록관 중 가장 작다. 심지어 도서관이나 카페, 전시관, 상업 시설 등도 아닌 오롯이 기록을 위한 곳이기에 명확한 목적을 가진 이들만 사전 약속을 통해 만난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은 인원이 연간 천 명을 넘어선다. 물론 누군가는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자신을 기록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굳이 프로그램에 참여 신청을 하고, 어딘가로 찾아가는 일이 번거롭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곳이 필요하다. 그곳이 바로 라이트하우스(Write house)다.
문예창작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 수업 시간에 ‘선명한 기억보다 희미한 낙서가 낫다’는 말을 들었다. 일상을 살피고 조금 더 세밀하게 순간을 기록하라는 의미였으리라. 그러나 그 말은 기록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과 닮아있다. 어떤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선명하지만, 이따금 그 본질이 흐려지거나 왜곡된다. 놀랍게도 낡거나 빛바랜 상태가 아닌 선명하게 변해버린다.
그러나 기록은 어떤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형태와 본질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그때의 감정은 증발해 버리고 오롯한 물질적인 기록만 남은 경우도 많다.
동네기록관의 이름으로 처음 진행한 프로젝트는 바로 신혼 시절의 선명한 기록과 희미해진 기억을 한데 모으는 <신혼을 여행하다>였다. 요즘은 결혼을 앞두고 전용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어 꽤 두툼한 사진집으로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과거에는 예식장으로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몇 장 찍는 일이 전부였다. 결혼식을 영상으로 담는 것은 상상조차 못 했고, 형편이 조금 나은 경우에는 결혼식 상황을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했다.
운천동 어르신들의 그 어여뻤던 그 시절을 꺼내어 새로이 기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앨범 속에서 낡아가는 사진과 기억이 아니라 언제든 쉽게 꺼내어 보고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운천동에서 미용실을 하는 미용사, 김밥가게를 하는 사장님 등 동네 어르신들과 모여 사진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앨범 속 사진을 스캔하고,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 장이 넘는 사진을 스캔하고, 서른 시간이 넘는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사십 년이 훌쩍 넘어버렸기 때문인지 어르신들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과거의 기록을 꺼내어 기억을 떠올리고 이를 다시 기록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만 긴 시간이 흐른 만큼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모두 안타까울 뿐이었다.
“기억이 안 나네. 너무 오래되었어.”
“육거리시장 앞에 있던 고려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어. 새로 들어온 드레스를 처음으로 입는 신부라고 했지. 남편은 친구들과 수다 떨다가 신랑 입장에 늦어버렸지.”
그때 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은 쉽게 잊히지만, 특별한 순간은 오래 기억한다는 것을. 그러나 꼭 특별해야만 기록이나 기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기록하지 않은 채 기억으로만 남은 과거를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기록하는 일은 미래로 뻗어있는 새로운 기록이 된다. 그래서 운천동에서 창업한 청년 열 명을 인터뷰하여 운천동 정착기를 담은 잡지인 은 이천 부를 인쇄하여 배포하였으나 금세 동이 났다. 밤의 운천동을 여행하고 예술작품으로 기록하는 <미드나잇 인 청주>, 자신만의 속도로 기록하는 <동네 산책, 동네 채집>, 퇴근 후 모여 자서전, 여행기, 에세이 등을 쓰는 <심야기록여행: 오늘을 집필실로 퇴근합니다> 등을 기획하여 운영하였고, 지난해에만 백 회차를 훌쩍 넘겼다.
‘라이트하우스’라는 공간의 이름을 정할 때 일부러 중의적으로 지었다. 기록하는 공간(Write house)이 삶에서 등대(Light house)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주를, 지금의 감정을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 기록을 통해 나와 주변을 기록한다. 이는 선명한 기록 곁에 선명한 기억을 덧칠하는 작업이다. 감정은 옅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은 빛이 바래더라도 오래도록 우리는 넘어 다음 세대를 잇는 매개가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