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숙 수필가
[동양일보]햇살이 따가운 담장 위로 다람쥐가 지나간다. 화살나무에 앉아 있던 참새가 총총거리며 따라간다. 마당에는 붉은 양귀비와 흰 데이지, 노란 창포꽃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붉은 찔레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수국은 짙은 화장이 지워진 늙은 작부처럼 색이 퇴색되어 초라한 몰골이다. 빛이 산란하는 정오가 막 넘어서는 나른한 시간, 평화로운 풍경 속에 나는 꺼져버린 두 생명의 장례를 치렀다.
기온이 높아져 여름이 빨리 왔다고 아쉬워해도 때가 되면 한 치의 오차 없이 순서대로 꽃은 피어나고 텃새들은 부화한 새끼들을 키우느라 바쁘다. 요즘 부쩍 요란스러운 참새와 직박구리가 잠시도 쉬지 않고 폐곡선으로 하늘을 가른다. 자식 키우는 열정으로 온 동네가 시끄러워도 원 없이 들을 수 있는 새소리가 좋다.
산마을에 집을 짓고 이사 온 지 삼 년째다. 그동안 수없이 주거를 옮기면서 아홉 번의 집을 지었다. 일반 주택에서 살다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는 편리하고 쾌적해서 좋았으나 오래 살지 못했다. 소음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내 집이라 해도 아래위층에 신경 쓰느라 늘 불편하고 불안했다. 결국 주거지를 옮겼다. 평생 살 생각으로 후회 없이 짓는다고 심혈을 기울였으나 완공 후에 보니 못마땅한 게 한두 곳이 아니다. 다시 집을 짓고 이사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 포기가 빠른 것인가, 빛이 잘 들고 조용하니 그것으로 위안으로 삼는다.
올해 처음으로 참새와 직박구리가 허락 없이 내 집에 터를 잡았다. 이층 처마 빗물받이 홈통 위에 집을 지어 알을 낳고 부화시킨 건 참새였다. 새끼가 커지자 허술한 집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홈통 속으로 내려앉았다. 새끼는 안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새끼를 구하러 동네의 장년 몇 분이 모였다. 하지만 놀란 새끼들이 버둥대면서 어른 키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구하려고 한 일인데 오히려 해가 되었다. 나는 작은 바구니에 망가진 집을 깔아주고 파닥이는 새끼 두 마리를 넣었다. 손길이 닿자, 어미인 줄 알고 노란 주둥이를 벌린다. 그 몸짓이 마지막이었다. 간절하게 살아나기를 바랐으나 내 바람과 달리 하루 만에 죽고 말았다.
경이로운 풍경이 지천이어도 죽음과 마주하면 마음이 무겁다. 아직 날개도 다 자라지 않은 작은 새는 몹시 가벼워 더 안타까웠다. 마당 한쪽 소나무 아래 무덤을 팠다. 한 삽이면 충분한 매장이다. 어린 새의 몸무게처럼 가벼운 죽음이고 조문객도 없는 쓸쓸한 장례다.
저녁나절 욕실 천정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였다. 미처 막지 못한 환풍기 통로에 집을 짓고 있다. 이번에는 직박구리다. 그곳이라면 비바람도 피할 수 있다. 내려앉을 일 없을 것이고 들고양이의 습격도 피할 수 있다. 그러니 직박구리의 어린 새끼는 내 손바닥 위에 가벼운 죽음으로 올려지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베란다에 새똥이 지천이어도 괜찮다.
대부분 새는 숲속에 터를 잡고 번식기에만 집을 짓는다. 천적을 피할 수 없다. 위험한 건 숲속이나 사람 집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터다. 생명이 있는 것들의 살아가는 일이 모두 그러할 것이다.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에 섞여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뻐꾸기는 또 어디에 알을 낳으려나. 세상 어디에도 가벼운 죽음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