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수필가

 
김혜경 시인·수필가
김혜경 시인·수필가

[동양일보]화들짝 놀라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숟가락을 잘 닦아서 음식물 쓰레기통에 꽂았다. 비슷한 일이 자꾸만 일어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자꾸 잊는 바람에 아침 출근길에 소지품을 문 앞에 죽 늘어놓는다. 그리고 빈손으로 나가기 일쑤이다. 처음에는 더럭 겁이 났지만, 늙어가는 과정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나를 다독인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엄마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 엄마의 기억을 위해 옛날이야기며 하루 중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한다.

누군가 기억이 사라지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의 기억이 사라지는 만큼 엄마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내 어린 날들을 찾아낼 수 없으니 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도 잊으시는 모양이다. 과거의 일들을 물어보면 대부분 ‘그랬나?’라는 대답 외에 더 들을 수 있는 말이 없다.

엄마의 기억 창고가 비어간다는 것은 내 과거의 일기장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써왔던 일기장이 큰 상자 하나 가득했었다. 그 일기장은 내 보물이었다. 삶이 팍팍하던 어느 날 아궁이 속에서 재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일기장은 재로 사라졌지만, 엄마의 기억 속에는 내가 고스란히 들어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엄마는 차곡차곡 머릿속 기억 창고에 저장하고 계셨었다. 그런데 그 기억 창고를 엄마가 비우고 계신다.

한여름 장마가 지나고 난 후, 강은 무서웠다. 사람들은 뽀얀 물안개가 장관이라고 했고 자연의 어마어마한 힘이 위대하다고도 했다. 붉은 흙탕물이 강을 가득 채우고 몸을 틀며 꿈틀대는 것을 볼 때는 현기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물이 더 무섭다. 강 건너편은 도저히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다. 기억을 잊는다는 것도 그렇다. 기억은 거대한 붉은 강을 건너 사라지고 나는 그 강을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엄마를 피해 기억은 붉은 강을 건너고 있다. 줄줄이 따라나서는 기억을 무슨 재주로 붙들어 둘 수 있다는 말인가. 기억이 사라지고 추억이 사라지고 내가 살았었다는 흔적이 사라진다.

그래도 엄마와 내가 살아야 할 날은 많이 남아 있다. 강 건너 떠나간 기억을 붙들지 못했어도 우리는 또 다른 하루하루의 추억을 만들고, 그 기억을 또 떠나보내는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숟가락을 닦아서 쓰레기통에 꽂고 다시 꺼내 닦고, 감쪽같이 사라진 휴대전화를 찾아 종일 냉장고를 뒤져야 하고, 출근길에 차 키를 가지러 몇 번씩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살다 보면 기적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어느 날 깜박 잊었던 기억이 불쑥 찾아와 환하게 꽃을 피울지도 모르겠다. 입속에 머물며 튀어나오지 않던 다정한 이름과 정원 가득한 꽃의 꽃말이 온전히 생각날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은 사람도, 기억이 가득한 사람도,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살아야 한다. 기억은 과거에만 머무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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