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이방주 수필가

[동양일보 ]<孤獨의 反芻>

이 책은 수필가 윤오영이 1974년에 낸 첫 수필집이다. 오지 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100리나 되는 군청소재지의 서점까지 나가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호롱불 아래서 이 책을 읽고 윤오영 수필에 취했다. 이듬해에 그 서점에 갔더니 <수필문학입문>이란 윤오영의 저서가 나와서 바로 구입했다. 수필 창작에 대한 전문서적이 별로 없었던 당시에 두 권의 책이 내게는 문학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어느 문학단체에서 ‘고전에게 길을 묻다’라는 수필문학 활성화의 심포지엄을 기획했다. 나는 이 기획에 발제자로 선정되었다. 평소에 우리만의 수필을 주장했던 나는 윤오영의 <고독의 반추>를 통해 우리 전통수필의 맥을 찾아 공론화할 기회로 가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재를 샅샅이 뒤져도 <고독의 반추>도 <수필문학입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아차’했다. 10년 전 집을 줄여 이사하면서 좁아진 서재를 생각해서 책을 마구 버렸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세로쓰기한 소설, 국어국문학 전문서적도 버렸다. <국어국문학> <문장> <사상계> 영인본은 그렇다 치고, 생각 없이 <고독의 반추>나 <수필문학입문>이 딸려 나간 것은 가슴을 칠 노릇이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길이라고 하지만 채우기 위해 버리는 것과 생각도 없이 버리는 것은 다르다. 내 앞에 있는 어떤 존재자는 찾아보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의미를 발견했을 때 ‘하나의 몸짓’이었을 뿐인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게 마련이다. 의미 없는 몸짓이든 꽃이든 그는 과거를 담고 내게 용기를 내어 온 것이고 그것이 현재이고 미래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에 버린 윤오영 선생의 수필집 <고독의 반추>는 오늘의 가능성을 담고 50년 전에 내게 왔던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기사를 보니 어느 국회의원 당선자가 대통령이 보낸 축하 난분에 ‘버립니다’라는 딱지를 붙여 사진을 찍어 자신의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계정에 올렸다고 한다. 그 화분은 자연인 아무개가 보낸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축하 난 화분에는 난석 알알에 꽃의 과거와 암향부동의 미래를 담고 있다. 따라서 당선인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고 정치인으로서 암향부동할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 분이 정말로 버렸든 버리지 않았든 ‘버립니다’를 공개하는 것에 힘을 준 것으로 봐서 스스로 총명함과 자신만의 정의로움을 자랑한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지향했던 진인(眞人)은 마음을 정제하고 좌망(坐忘)에 이르는 것이라 했다. 이때 ‘팔다리도 몸뚱이도 다 털어버리고, 총명함으로부터 벗어나서 외부의 형체로부터 지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10여 년 전 세로쓰기를 버리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일이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또 ‘버립니다’하고 세상에 자랑하며 버린 총명이 우리의 대표라는 것도 부끄럽다.

50년 전 1000원에 샀던 <孤獨의 反芻>가 중고서점에서 40~50만원에도 구할 수가 없다. 버려야 할 것은 ‘내가 가장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오만,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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