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 시인

김창규 시인
김창규 시인

[동양일보]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창 꽃이 피었다지는 계절이다. 감꽃도 피었다가 졌고 밤꽃이 하얗게 마을의 뒷동산을 덮었다. 남한강을 함께 걸으며 충주에서 청주까지 말없이 기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생각난다. 단양에 살고 계시는 시인 신동문 선생님을 만나기로 약속하여 갈 때이다. 역사는 반복한다지만 4.19도 지난 지 64주년이 되었고 5.18도 지난지 44주년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저항의 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절필하며 감히 군부독재 치하 글을 쓸 수가 없을 때 그는 남한강 변에서 시를 썼다. 신경림 시인이다. 그분과 함께 신동문 선생을 만나 뵙게 된 것이다.

신동문 시인은 <풍선기>라는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고 박정희 시대 절필을 선언하며 단양에서 과수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침을 놓아주며 침술 값으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위대한 시인과 점심은 아홉 가지 잡곡밥을 손수 지어주시던 선생의 온화한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차가 없을 때라 단양에서 시골길을 걸어 고개를 넘고 해서 만났다. 신동문 시인은 대범한 사람이었다. 나의 이력을 들었다던 선생은 일찍이 고교 시절 청주독서회 때부터 명성을 들었다.

지나간 것은 그립다. 신경림 시인도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 88세의 나이로 별이 되었으니 그의 주변에 떠 있는 별들도 그가 살아온 만큼이나 유명 무명의 별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장례식날 박상규 작가와 정연덕, 김태수 시인을 노은 초등학교 정문에서 만났다. 뵌 지 오래였는데 고인으로 말미암아 만나게 되었다. 모두 신경림 시인과 인연이 있었다. 뜻밖에 놀란 것은 조철호 시인 형을 만난 것이다. 그분은 80년 초에 수배자를 집에 숨겨주었던 의로운 분이다. 그분과 만남이 실로 오래되었듯이 신경림 시인과의 인연도 오래다. 유종호 평론가와 함께 신경림 선생을 모신 것이 이십 년 이상으로 알고 있다.

6월은 대한민국 시민들의 민중항쟁으로 빛나는 계절이다. 5월에 시들어 버린 꽃들이 죽지 않고 피어나듯이 6월에 한국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백만 명도 넘을 것이라 한다. 이승만 미 군정과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대 그렇게 희생되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기억되고 하는 인물이 있다. 강우진 드라마작가이다. 신경림 시인과 친구이다. 아들이 운동권 출신이라고 고민하던 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주 만난 것은 또한 신경림 시인과 인연이었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연극인이 기자가 되어 원고를 청탁해 왔다. 젊은 시절부터 연극을 했던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영정 사진과 걸어오는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새삼스럽지만 조철호 형의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지나간 것은 노래처럼 흘러갔다. 권재은 명창의 요령 소리로 수십 개의 만장 행렬이 뒤를 따른다. 말이 씨가 된다. 마지막 불러 달라던 노래를 부르는 그의 눈물은 바람 따라 남한강 흘러서 갔다.

최루탄에 맞아 죽어간 김주열 군이 있었다면 이한열 열사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학살했던 광주 계엄군과 공수부대도 있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신경림 시인의 영원한 세상은 천국이나 극락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가 살았던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가 천국이었다.

목계장터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웃던 시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밤늦은 시간 그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경림 시인은 5월과 6월의 시인이다. 한 번도 화낼지 몰랐던 선한 얼굴에서 성북구 길음동 언덕배기 집의 가난한 시인의 사랑 노래는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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