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묵 시인
[동양일보]법은 차치하고 도덕적 윤리적 잣대가 추락하고 있다. 과거의 기준이 현재에 맞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최젓값이 흔들리는 건 실로 심각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는 점이다.
이제는 지엽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듯 보인다. 자생의 시간을 넘겨버린 지금, 누구보다도 사회 지도층의 책무가 과중한 시대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책임은 찾을 수 없고, 대중의 목소리는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삶의 수준이 높아진 요즘에 통제나 억압은 원초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건 거대한 정의가 아니다.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의미 있고 대부분 사람은 사회적 통념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간다.
세상은 이런 기준을 상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식은 개인의 영역에서보다 공공의 영역에서 보다 철저하게 작동해야 옳다.
최근 들어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라는 말을 자주 접한다. 이 말은 논리가 아니라 궤변이다. 문제를 회피하여 본질을 축소하려는 의도적 행위다. 상식은 발생한 문제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다’라는 자의적 기준을 제시하여 법적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삼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이 세상에 혼자만 존재한다면 모든 기준은 당연히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은 크고 작은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이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 법이고, 그보다 큰 무형의 기준을 상식이라고 한다.
얼마 전 초등학생이 교감 선생님 뺨을 때린 일이 뉴스에 나왔다. 이 기사에 사람들이 쏟아낸 분노의 목소리는 보편적 상식이 깨진 현상에 대한 당연한 표출일 것이다. 또한 음주운전, 학력 위조, 채무 관계, 학교 폭력 등으로 숱하게 쏟아지는 유명인의 기사에 대중의 분노가 몰리는 까닭도 마찬가지로 어긋난 사회적 통념에 대한 질타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이런 식의 합리화는 결코 보편적 가치가 아니다. 공동체의 기준을 ‘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더욱이 사회에 영향력이 큰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엄격해야 한다. 그럼에도 근간 사회 지도층의 언행을 보면 심각함을 넘어 과연 공공을 우선한 처신인지 의문이 크다.
타자에게 적용하는 잣대와 자신에게 적용하는 잣대가 다르다면 누구라도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물리적 같은 편이라고 해서 이중잣대를 묵인한다면 그들 또한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가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을 두고 면죄부를 부여했다. 법도 상식도 무너지는 결정 앞에서 국민의 분노는 여느 때보다 크다.
가치관의 차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사회적 통념을 벗어났을 때, 혹은 공공의 상식을 깨트렸을 때 사회 질서는 흔들리고 혼란은 가중된다. 이때 양분되는 힘의 대결이 사회 불안을 가중한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를 통해 검증되었다.
그러므로 무너진 법과 도덕과 윤리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 지도층과 유명인은 자신에게 더 엄정한 기준으로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 죄책감은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느끼는 감정이다. 죄책감이 무감각해지는 사회에서 힘으로 작동한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오류가 없는 시스템은 없다. 또한 인간은 절대 완벽하지 않다. 세상은 불합리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이유는 완벽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불합리한 범주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어떻게 포용해야 하나, 어떻게 용서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더 늦기 전에 머리와 가슴을 맞대 공동체의 감각을 회복해야만 한다. 분노가 절망이 되면 그때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을 맞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