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숙 수필가
[동양일보]내 가게에서 오른쪽으로 쭉 가다 보면 농협에서 운영하는 농약방이 나온다. 그 맞은편으로 공중전화박스가 있지만 그 박스 안에서 누군가 전화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공중전화박스 옆으로 컨테이너로 지은 구둣방이 있었는데 어느 날 구둣방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야채를 팔던 부부가 풀빵 기계를 놓고 야채와 함께 풀빵을 구워가며 팔았다.
야채장사 아저씨는 좀 엉뚱한 면이 있어 별명이 안드로메다였다. 이 말 하면 저 말하고 저 말하면 이 말 한다. 결국 딴 말을 한다는 얘기다. 어떤 날은 대화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너무도 엉뚱한 말을 해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게다가 융통성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안드로메다 아저씨는 바람이 심하게 불때면 내 파라솔을 붙들어 전봇대에 매주거나 갑자기 비가 쏟아질 때는 포장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고지식하지만 선한 사람이었다.
주름 하나 없이 동글동글한 얼굴에 영 풀어질 것 같지 않은 곱슬곱슬한 파마를 한 안드로메다 부인은 나와 동갑내기다. 얼마나 알뜰한지 무를 팔면서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들어 내다 팔고 뭐 하나 허투루 버리는 것이 없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 성실함 때문인지 구읍에 근사한 전원주택을 지어서 이사했다고 했다.
부부간에 장사를 하면 속 터진다고 싸우기 일쑤인데 이집 부부는 큰소리 한 번 내는 일이 없었다.
지난 옥천 장날에도 안드로메다 아저씨는 전을 펴고 햇살이 퍼질 무렵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우리 가게 앞을 지나 악세사리를 파는 최 씨에게 갔다. 의자 위에 작은 판자를 깔고 김치 몇 쪽과 순대를 안주로 놓고 웃으면서 해장술을 마시는 게 하루의 즐거움인 듯싶었다. 그 틈에 허리띠와 돋보기를 파는 박 씨도 합석한다.
오일장마다 만나는 그들이 친하다는 것은 장꾼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옥천장이 열린 어느날, 구수하고 달큰하게 코끝을 자극하던 풀빵 냄새가 풍겨오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 쪽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생강장사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며 "밤새 안녕이라더니.."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몰랐어요? 저기 풀빵 있잖아, 풀빵" "풀빵 아저씨요? 왜요?" 어제 영동장에서 전을 펴고 해장술 한 잔을 입에 부은 후 멀쩡히 앉아있던 의자에서 갑자기 미끄러져 바닥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구급차가 오기까지 이 사람 저 사람 심폐소생술을 했다지만 곧 숨이 멎었고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다.
어떤 이가 풀빵 마누라가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달려오는데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양파가 데구루루 굴러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녀, 나는 축구공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니께." 그 상황을 지켜본 또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갑자기 떠나간 안드로메다 아저씨의 죽음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장거리가 어수선했고 장꾼들도 말이 줄었다. 장날이면 막걸리 병을 들고 "안녕하세요" 하며 지나가는 안드로메다 아저씨가 5일 후면 돌아오는 옥천장에도 그다음 장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오늘 누군가 나의 블로그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순간입니다. 매순간 정신을 바짝차리고 오늘 하루의 안녕을 빌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만 지나도 다음날 만나면 이 말로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이 인사말이 얼마나 소중한 인사말인지 느끼게 해 주는 글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