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시인·화가

양산 비단강, 양선규 촬영.
양선규 시인·화가

[동양일보]흐르는 강물도 잠시 멈춘 듯 후끈후끈한 한낮, 양산 비단강, 제방 둑길을 걷는다. 지난 초봄 이후 오랜만에 걸어보는 길이다. 노랑, 연두, 초록, 보라 꽃 등의 여름꽃이 걸어가는 길마다 바람에 흔들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짙은 풀 내음과 꽃의 향기가 몸을 스치며 내 발자국 따라온다.

인적 뜸한 한낮, 양산 들판의 허공에 새 한 마리 날고 잠자리 몇 마리 천천히 비행하는 정오, 금계국, 능소화, 나팔꽃, 참나리 등 이름 모를 꽃들까지 합세하여 풀꽃들이 환하게 길 밝히고 연한 하늘색 하늘에는 솜사탕처럼 하얀 구름 두둥실 떠 있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1921∼1968) 시 '풀 전문

풀 길 걷다 보니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생각난다. 바람 부는 오늘도 들판의 풀은 시인의 '시'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여름의 들꽃은 햇볕이 강할수록 색이 더 곱고 향이 진하다. 어느 길을 걷든지 요즘 나비와 벌, 사정없이 달려드는 한여름, 생명, 평화, 꽃들의 잔치로 숲과 들판이 한바탕 소란스럽다.

길을 걸으면 등줄기로 흐르는 땀이 말해주듯 가혹하리 만큼 무더운 여름이다. 생각해 보면 나이 들고 해가 갈수록 한여름의 더위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지는 걸 보면 공활(空豁) 한 우주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지구와 내 몸도 이제 지칠 대로 지쳐 그렁그렁 한 가 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으로 지나치게 자연에 대해 홀대하고 함부로 대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지구의 기후 위기에 대한 심각성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지구의 뜨거운 열기로 나무나 풀이 말라죽거나 물 부족으로 농수와 식수난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지칠 줄 모르는 편리함과 경제 발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독한 성장 병인지도 모른다.

나는 유년 시절, 자동차도 없고 전기 시설, 선풍기 하나 없는 농사일을 주로 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개울에서 물 장난으로 더위를 달래고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부어주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등줄기 시원하던 등목이 최고의 피서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동네의 이웃들과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의 평상 위에, 두런두런 앉아 삶은 옥수수나 감자를 먹으며 부채 하나만으로 시원한 여름을 나던 유년 시절이 그립다. 1970년대에 비해 국민 소득이 10배 넘게 성장한 요즘 들으면,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한 꿈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그때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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