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문학평론가

김묘순 문학평론가

[동양일보]장마다.

이수익 시인을 만났다.

「승천」으로 7회 지용문학상을 받은 그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진 「우울한 샹송」을 듣는다.

“우체국에 가면 /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 (중략) //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 꽃을 달고 오는데 /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 (중략) // 사람들은 /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 애정의 핀을 꽃고 간다”

가수 길은정의 목소리가 비 오는 창가를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가수의 아픔과 기구하였던 일생이 겹쳐 더욱 가녀리고 애잔하게만 들린다.

왜 사람들은 슬픔 없이 살아가지 못하는가.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슬픔이, 슬픔이 한 뼘씩 자라야만 하는가. 그렇게 웃자란 그 슬픔 위로, 피어난 열매 한 송이가 기쁨이련가. 정녕 그런 것인가. 그럼, 기쁨이라는 열매를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고 살아간다면 슬픔은 자라지도 찾아오지도 않는 것인가.

사랑이란 슬픈 감정이지만, 시간과 만나 부딪히고 마모되면 그리움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부딪힘과 마모의 시간은 많은 시간을 괴로움과 마주하게 만든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것이다. 시인 이수익에게도 그러한 시간들이 지나갔을까.

이수익 시인의 여자친구가 있었단다. 「우울한 샹송」을 쓴 것은 여자친구와 사귀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상황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로 설정하였다. 그랬다. 시란 지은이가 화자를 앞세워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산해 내는 장르이다. 그렇기에 「우울한 샹송」이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나타났다.

길을 걷다 비틀거릴 때도 있다. 길을 잃어버려야 행복할 때도 있다.

두서없이 말이 길었다. 큰 시인을 만나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지용문학상을 받은 시인들을 만나 동정을 살피고 그들의 문학세계를 접하고자 하는 마음은 뜰팡에 빗방울 떨어지듯 토두락 동당거린다. 마음만 급하다.

밖에는 비가 억수로 퍼붓는다.

「우울한 샹송」은 그 빗속을 뚫고 나무에도 책상에도 필통에도 지우개 속으로도 울려 퍼진다.

슬픔, 그 위로 자라난 기쁨이라는 열매를 생각한다. 슬픔이, 슬픔이 있어야만 기쁨이 찾아온다면, 그런 기쁨을 거부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면 슬픔이 없어지는 것인가 애초 찾아오지도 않는 것인가.

「우울한 샹송」을 쓴 이수익, 그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던 길은정,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는 나를 일직선으로 늘어놓는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도 없이 슬픔과 기쁨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맞이하며 살아가거나 살다 간다.

며칠을 끙끙대며 되먹지 않은 듯한 잡기를 마무리한다. 기쁨이 도저히 자라날 것 같지 않다. 아직도 슬픔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슬픔 ‘비키’라고 할 수 없다. 비키란다고 호락호락 물러날 성질의 소유자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그냥 그렇게 슬픔과 공존하며 우울해하며 살아들 간다. 나도 그렇다.

우체국에 가면 정녕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체국 앞에 집을 사서 그곳에서 평생을 살 일이다.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것이 더욱 소중하고 가엾어지는 날이 있다. 유독 그런 날이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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