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동 상당구 민원지적과 지적팀장
[동양일보]조선시대 600여 명의 어사(공개된 직무수행)나 암행어사(밀명의 직무수행)하던 직책으로 원래 당하관(종3품) 중에 뽑아 마패, 유척 등을 주어 집에도 들르지 않고, 즉시 내려가 4대 문밖에서 밀명 확인 후, 직무를 수행하고, 한양에 돌아와 장계(보고서)를 올렸다.
수많은 암행어사 중에 박문수(朴文秀, 1691~1756)를 첫손에 꼽는다. 그러나 실제로 영조실록에 박문수를 어사로 지방에 보낸 것은 1730년(영조6년) 호남지방 어사(호서어사)로 굶주리는 백성을 돌보는 첫 어사의 소임을 완수하여 많은 칭송을 받았다. 1731년(영조7년) 함경도의 기민을 구제하고 영남지방을 돌아보게 했다.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청렴하고 사리에 밝은 박문수를 자주 어사나 암행어사로 보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고을의 수령들은 몸을 벌벌 떨었고, 백성들은 박문수 어사가 자기 고을에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가는 고을마다 수령들의 부정부패 척결과 백성의 억울함을 풀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 처리는 너무나 공정하고 과감해서 누구나 혀를 내둘렀다.
그가 경상도 바닷가를 돌아볼 때 마침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났다. 바다에 집채가 떠내려오고 그릇·목재 등이 밀려와 바닷가에 가득 쌓였다. 북쪽에서 떠내려 왔다고 생각하여 강원도나 함경도에 큰 홍수가 났다고 생각했다. 경상도 제민창(濟民倉) 곡식 3,000석을 북쪽으로 실어 나르게 결정하고, 사후에 조정에 보고했다. 나중에 큰 문책의 위험이 있어 주변 사람들이 적극 말렸다.
“조정의 명령 없이 곡식을 다른 도로 옮기면 뒷날 문책이 따릅니다”“북도 백성들이 살아날 길은 오직 경상도 곡식을 옮기는 길밖에 없소!”
그는 서슴없이 곡식을 배에 싣고 북쪽으로 가도록 했다. 그때 함경감사는 큰 수해를 당했으니, 경상도 곡식으로 구제해 달라는 글을 조정에 올렸다. 어느 날 바다를 보니 깃발을 꽂은 많은 배들이 곡식을 가득 싣고 포구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조정에 곡식을 요구하는 글을 보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곡식이 도착했다. 적시에 각 고을에 보내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살려냈다. 문책은커녕 오히려 밝게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큰 감동을 받았던 백성들이 함흥의 만세교 다리 앞에 송덕비를 크게 세웠다. 마을에 있는 송덕비는 대개 부정한 관리가 자기 청렴을 드러내려고 강제로 세웠으나 이 송덕비는 예외였다. 함흥 사람들이 비석을 소중히 돌봤다고 한다. (국조인물지)
그 뒤 충청도 어사, 함경도 어사, 경상도 균세사(均稅使, 조세를 감독하고 공평하게 하는 임무)를 역임하면서 굶주린 백성 구제와 세금 징수의 공평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이화 인물한국사 참조)
정부에서 공직자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에서 박문수처럼 청렴하면서, 적극적으로 맡은바 업무를 처리할 공무원의 출현을 희망하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