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한증막 같은 더위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도 이 날씨를 견딜 수 있는 것은 파리 올림픽의 중계에 몰입할 수 있어서이다. 특히 양궁과 사격의 경기를 보는 맛이 쏠쏠하다. 숨막히는 긴장 끝 샷이 정확히 과녁에 꽂힐 때 전율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경기를 마친 후 메달 시상식은 또다른 보는 재미가 있다. 파리 올림픽은 확실히 여러 가지로 특색이 있다. 파리 올림픽을 후원하는 명품브랜드 루이뷔통 디자인으로 장식된 운반대에 메달이 놓여 있고, 메달에는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 건립에 쓰인 철 성분이 실제로 들어가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메달 의전 요원들의 복장이다. 헐렁한 트레이닝복 스타일의 바지에 셔츠, 가브로슈 모자로 통일한 요원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남성 여성 구분이 없는 유니섹스 스타일이다. 진작에 이랬어야 한다. 그동안 올림픽 봉사자들의 옷차림이 기능성보다는 패션과 디자인에 신경을 써서 불편해 보였다.

이번 파리 대회의 놀랍고도 획기적인 점은 ‘완전한 성평등 올림픽’을 표방한 점이다. 전체 참가 선수 1만 500명의 남녀 비율이 50대 50이다. 남녀가 동수로 참여해 지구촌 스포츠 축제를 성별 차이 없이 즐기자는 취지이다.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 여성 선수 참가를 처음으로 허용한 지 124년 만에 세운 또 하나의 기념비다.

사실 그동안 스포츠계는 전통적으로 남성 경기에 중점을 두어 왔다. 경기 순서도 여자 결승전을 먼저 하고, 그 다음 남자 결승전을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번 파리 올림픽의 대미는 기존의 남성 마라톤 대신 여성 마라톤이 장식할 예정이라고 한다.

파리의 자신감은 개막식에서 최고를 보여주었다. 4시간 동안 진행된 개막식을 꼬박 지켜보면서 이들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혁명과 예술의 나라라는 문화적 자긍심이 개막식 곳곳에서 드러났다. 전통적인 체육관을 벗어나 센강으로 과감히 개막식 장소를 옮긴 것은 그러한 자부심과 혁명적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친환경’과 ‘가성비’로도 최고였다. 파리올림픽 개최 비용은 약 88억달러(약 12조원)로 2020 도쿄올림픽 대비 4분의1, 2008년 베이징 올림픽(72조원)의 6분의 1 수준이다.

개막식에서 배를 타고 선수들이 입장한 것은 유니크하고 신선했다. 그 사이 복면의 사나이가 파리의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센강 위로 짚라인이 지나가고, 강변과 바지선, 건물의 발코니, 옥상에서 오케스트라와 밴드, 댄서 등이 별도의 무대없이 공연을 했다. 강을 따라 빠른 속도질주한 철마 탄 철의 여인도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제일 눈길을 끈 것은 센강을 따라 올라온 황금동상의 10여인상이었다. ‘프랑스를 만든 10명의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자국의 여성 위인들을 소개하는 파트였는데 여성 운동가들을 차례로 소개할 때 ‘성평등 올림픽’을 표방한 파리 올림픽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날 소개된 여성 운동가들은 △197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올랭프 드 구주를 시작으로, △1922년 최초의 세계 여자 대회를 조직한 앨리스 밀리아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여성 인권을 위해 투쟁한 지젤 알리미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자 페미니즘 선구자인 폴레트 나르달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한 탐험가이자 식물학자 잔느 바렛 △유럽 최초의 전업 여성 작가 크리스틴 드 피잔 △파리 코뮌의 아이콘이자 무정부주의자 운동가 루이즈 미셸 △세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알리스 기 △임신중지 합법화를 이끌어낸 판사 시몬 베이유 △페미니즘의 고전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다. 이 동상들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엔 파리 시내 곳곳에 세워진다고 한다.

물론 개막식에 몇 가지 혹평도 있긴 했다. 디오니소스 패러디 부분이 기독교 모독으로 논쟁을 일으켰고, 비가 쏟아지는 야외 행사로 산만해서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튈르리 정원에서 초대형 열기구 모양 성화대에 불을 붙이고 그 열기구가 실제로 하늘 높이 떠오른 뒤, 에펠탑에서 근육경직으로 투병중인 셀린 디옹이 ‘사랑의 찬가’를 열창할 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치 개막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콘서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프랑스만이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적인 개막식. 역시 파리는 파리였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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