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

김혜경 시인

[동양일보]오늘이 입추다. 절기는 무섭게도 맞아들어간다는 느낌이다.

지독한 더위가 완연하게 한발 물러섰다. 구름이 한치만큼 높아졌고 하늘은 파래졌다.

지나치게 맑은 호수가 두려움을 주는 것처럼 지나치게 파란 하늘도 막막함을 주는 것 같았다. 허공이라는 단어는 모두 비어있다는 의미겠지만 가득 찼다는 의미이기도 하단다.

허공에 발 한 짝 들이밀려 하면 이미 누군가의 발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허공은 텅 빈 공중이며, 다른 것을 막지 아니하고 다른 것에 막히지도 않는 物과 心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본체라 했다.

얼마 전 생각지 않았던 이별 앞에서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상이 갑자기 비었다. 오롯이 혼자 남은 느낌이다.

언제나 이별은 나를 당황하게 하고 절망스럽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보내며 온몸이 떨렸다. 예견하지 못했던 이별은 나를 허공 속으로 던져버렸다. 텅 빈 공간, 그 지나치게 파란 공간 어딘가에 나는 추락하였다. 그곳에선 시간이 멈췄다.

젊은 날 나의 사랑이었고 우상이었던 알랭 드롱이 나를 떠났다. 중학교 때 처음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를 봤다. 그 이후 나는 요즘 말하는 외화 덕후가 되었다. 알랭 드롱은 신이 빚은 몸이었다. 우수에 찬 깊은 눈동자는 천 번을 봐도 빠져들게 했다. 범죄의 냄새가 가득한 몸짓과 삐딱한 시선은 불량기 도는 의리 있는 동네 오빠 같기도 했다.

소녀 시절 한 번쯤은 선생님을 사모하든지 아니면 교회 오빠를 남모르게 좋아해 볼 만도 하지만 영화에 빠져 살았던 나는 오로지 알랭 드롱이 내 사랑의 전부였다. 알랭 드롱 전에는 제임스 딘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의 짧은 생은 어린 소녀의 열망이 다 익기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알랭 들롱이 나오자 잘생긴 사람은 명이 짧을까 봐 공연히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 나는 ‘태양은 가득히’의 톰 리플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악을 구별 짓기에 그의 미모는 이유 불문이었다. 요즘 어린 학생들이 얼굴이 예쁜 여자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했던 말을 나는 그때 실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태양은 가득히’의 주제곡이 들리면 절로 걸음이 멈춰지곤 하는 것이다.

애잔한 선율로 흐르는 OST ‘plein soleil’은 나를 지중해의 넓은 바다와 요트에 엎어져 있는 톰 리플리의 슬픔과 고뇌에 찬 등을 보여줬고 석양에 일그러진 짙은 속눈썹과 헝클어진 머리칼이 보이는 듯했다. 언젠가 한 번은 지중해에 꼭 가보겠다는 내 버킷리스트도 알랭 들롱을 느끼고 싶어서일 것이다. 꼭 한번은 그가 탔던 요트를 타고 지중해의 석양을 보고 싶고 어둠이 내린 바다에 세상을 잊고 떠 있고 싶은 것이다.

톰 리플리에서 만들어진 리플리증후군은 자신을 다른 사람이라고 자신을 세뇌하는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한다. 그러나 톰은 자신이 죽인 친구의 신분을 탈취해서 살긴 했지만, 그는 늘 고통 속에 있었고 괴로워했고 불안해했었다. 리플리증후군이라는 병명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그는 리플리증후군을 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욕망과 범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청년 톰 리플리 아니 알랭 들롱의 비극적 삶이 늘 가슴 아팠다. 가끔 늙고 병든 알랭 드롱의 모습을 매체에서 보긴 했었다. 그래도 그의 늙어가는 모습조차 가슴에 담고 싶었던 15세 소녀가 이제 그를 허공에 놔줘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은 이제 그로 가득 차 있을 것이고 그의 우수에 찬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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