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자 충북농업기술원 농업환경연구과장
[동양일보]오래전에 시골에서 이앙기로 모내기를 능숙하게 해내고 있는 여성 농업인을 보고 너무 멋있어서 한참 지켜본 적이 있다. 충북농업기술원에는 여성 농업인이 관리기, 굴착기, 트랙터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실습할 수 있는 여성농업기계 교육과정이 있고, 농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여성 농업인이 점차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농업 분야도 양성평등이 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나의 경우 농업연구직이라는 특수성도 한몫했는지 직장에서 성차별 문제로 크게 고민한 적이 없었으니 행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직장이 아닌 가정에서는 양성평등이 늘 풀기 어려운 숙제였고, 불평등한 가족관계로 인해 많은 고민도 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온 것 같다.
최근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드라마 ‘며느라기’ 영상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결혼하고 맞이한 첫 제사에서 시어머니와 큰며느리인 본인만 제사 준비를 해야 할 상황이고 나머지 가족은 모두 노는 것이다. 그러자 조목조목 따져가며 일하지 못하겠다며 집으로 간 강단 있는 큰며느리가 시집에서의 부조리한 일들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드라마 속 큰며느리를 보고 통쾌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30년 가까이 큰며느리로 살아온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시부모 그리고 남편의 형제 관계 속에서 누가 봐도 불합리한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가방끈이 길어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나는 대놓고 시집 식구들 앞에서 내 생각을 똑 부러지게 표현하지 못했다. 물론 남편에게는 그 상황이 올바른 것인지 이야기했지만 그때마다 가족이니 이해해달라는 말을 듣곤 했다. 화목한 가족관계가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무엇보다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라가는 음식 준비가 주로 시어머니와 큰며느리의 몫이라는 것이 불합리했다. 더욱이 몇 년 전부터 간소한 차례상에 대한 여러 기사를 접하고 나서는 형식에 치우치는 음식 준비가 더 힘들게 느껴졌다. 녹록지 않은 직장 생활, 삼남매 육아 그리고 며느리 역할까지 치열한 아내의 삶을 잘 알고 있는 남편은 ‘제사와 차례는 큰아들에게 절대로 물려주지 않고 우리 대에서 끝낸다’는 나의 생각을 오래전부터 지지해 주어 그나마 위안을 삼고 견뎌온 것 같다. 기성세대인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산 사람이 행복한 명절’을 보내는 이웃의 영향을 받아, 올 추석부터 차례는 지내지 않고 가족끼리 식사만 하게 됐다. 식사 준비도 설은 내가, 추석은 동서가 번갈아 가며 하기로 결정이 되어 이번 추석에는 거의 30년 만에 몸도 마음도 편안한 명절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배려와 존중이 있는 양성평등한 명절 문화가 하루빨리 자리잡혀 ‘명절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접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적어도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게 되도록 나부터 노력할 것이다. 아들 둘이 있는 엄마 입장에서는 ‘며느라기’ 드라마 속 큰며느리와 같은 며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그리고 딸 가진 엄마 입장에서는 ‘반반’ 또는 ‘똑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양성평등을 주장할 것 같은 막내딸과 드라마 ‘며느라기’를 같이 보며, 가족관계와 양성평등이라는 주제로 얘기 나눠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