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희 청주시 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 직지홍보팀장
[동양일보]요즘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바로 “엄마는 내 마음을 몰라” 그런 말을 하는 딸을 보고 있으면, 필자 또한 “그러는 너도 엄마 마음을 모르는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무튼 마음을 가다듬고 대화를 다시 시도하면, 딸아이는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와는 할 얘기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며 방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소통의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도대체 딸아이는 어떤 부분에서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말하는 걸까? 그간 사회생활로 연마된 나름의 소통기술을 통해 인간관계를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 주말, 마음을 정리하고자 딸과의 대화들을 복기하며 소통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봤다. 눈을 맞추며 잘 경청했는가? 격려와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했는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했는가? 내 이야기만을 강요했는가? 등등 수십 개의 문장을 늘어놓으며, 필자 자신의 문제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딸과의 대화는 늘 괜찮았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고민하다가, 평시 외손녀와 사이가 좋은 필자의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로 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이야기를 한참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랬구나!라는 말을 한번 써보렴” 굉장히 짧고 명쾌한 설명이었다. 나는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에 “정말 이 한마디면 되나요?”라고 되물었다. 아버지는 나머지는 필자보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더 이상 말이 없으셨다.
“그랬구나”라니, 그 말은 그냥 상황을 방치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곧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의미는 바로 “공감”이었다.
그렇다. 딸 아이는 따뜻한 격려, 온화한 눈빛, 그리고 진심어린 조언보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 제일 중요했던 것이다.
격려와 조언은 화자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공감은 청자가 주인공이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 감정을 온전히 헤아려 주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필자의 언어에는 진심어린 공감이 부족했다. 필자는 딸 아이를 이해하는 척하며 종국에는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업무를 처리하려면 늘 해결책과 결론이 있어야 하기에, 그런 생활에 익숙해 있던 필자는 딸 아이와의 대화에서,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필자의 생각을 나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춘기 소녀에게 정답은 필요가 없었다. 그저 본인 감정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시기 아이들은 학업, 친구, 외모 등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이며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사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 자신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부모는 깊이 공감해주고, 본인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 주기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 주는 것이 진정한 소통을 이루게 하는 핵심임을 “그랬구나!”의 기적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