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호 아동문학가
[동양일보]행사 진행자로 등장한 유영선 주필의 멘트는 절제 있으면서도 다감했다. 단번에 관중들이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고쳐 앉게 했다. 추모 묵념에 이어 추모 영상이 상영되고 음악인 이상덕 교수의 생애를 돌아보는 동안 외손녀 박혜나가 연주하는 첼로의 선율이 감미롭게 마음속으로 젖어 들었다.
추모영상에 이어 무대에 나온 분은 테너 채완병 교수님이었다. 올해 연세가 85세가 되신 교수님.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어 많이 연로해 계셨지만 이 순간은 테너 가수로 돌아와 무대에 서신 것이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인가. 헤아려 보니 무려 50여년이 지났다. 교수님을 뵙고도 달려가 인사드리지 못하고 객석에 앉아 있으니 죄스러워서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사죄의 인사를 드렸다. 부를 노래는 Panis angelicus(천사의 양식·생명의 양식)이다. 교수님의 노래가 울려퍼지자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이 몰려왔다. 젊은 시절 못지않은 성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와 멋진 모습이 또 있을까? 무엇이 85세 노교수님이 수많은 제자를 대표해서 헌정곡을 부르게 하는 것일까? 이상덕 교수님은 채완병 교수님이 평생 음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분이시기도 하다.
이상덕 교수님을 기리는 별칭은 다양하다. ‘충북 음악의 씨앗을 뿌린 전도사’, ‘청주음악인협회 초대 회장’, ‘한국음악협회 초대 충북지부장’, ‘한국예총 충북지부장’, ‘청주관현악단 창단 지휘자’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그중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역시 사랑으로 숱한 제자를 길러낸 것이리라.
“엄마는 태동관에 짜장면을 시키시곤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셨어요. 돈이 너무 없었거든요. 어느 날은 국수를 삶고, 어느 날은 달걀을 삶고…” 3녀 이대희씨의 말에서도 교수님이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얼마나 열정적으로 가르쳤는지 알 수 있다. 진심은 세월이 갈수록 더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교수님의 가족에게서도 이런 진심이 그대로 묻어났다. 외손녀 최나경은 세계 10대 플루티스트로 손꼽히는 재원이다. 외할아버지 탄생 100주년 추모 음악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자 모든 일정을 미루고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왔다고 했다. 나는 음악에 문외한이라서 연주한 곡에 대해서는 입도 떼지 못하지만 진심을 다해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기나긴 메인 곡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그치지 않는 관객들 앞에 다시 나와 ‘녹턴’을 연주하고 가장 짧은 곡 ‘왕벌의 비행’을 한 호흡으로 연주할 때 감히 나는 플루트 연주의 극치를 보았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관객들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구나. 언제 또 세계적인 플루티스티가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 바짝 차리고 귀 기울여 들었다.
청주시립교향악단의 연주 또한 감동이었다. 교수님이 1973년 창단해서 15년간 무보수 상임지휘자로 이끌었던 청주관현악단이 청주시립교향악단으로 재창단될 때 지휘봉을 넘겼다고 했다. 이 밤 단원들이 하나가 되어 헌정한 음악(Dvorak / Symphony No. 9 in e minor, Op. 95,)을 듣고 교수님은 하늘에서 얼마나 흐뭇해 하셨을까? 그리고 김경희 상임지휘자의 사연 또한 감동이었다. 며칠 전 교통사고를 당해 완치가 되지 않은 몸임에도 기꺼이 나와 지휘를 했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추모하는 마음을 모아 이루어낸 음악회였다. 그것은 일찍이 이상덕 교수님이 불모지인 충북 땅에 선구적으로 뿌려놓은 음악의 씨앗이 발아해서 꽃을 피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밤 이상덕 교수님은 변함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웃어보이면서 우리 앞에 돌아오셨다. 선생님의 부활을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