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동양일보]79년 천보산 벙커 작업.
시멘트 지고 날마다 정상에 오르는 군인의 고된 일상이었다. 오전 오후에 네 번씩, 도합 여덟 번을 산 정상까지 오르내리면 관절에서 버걱버걱 소리가 났다. 언제부터였나, 작업 직전 갑자기 총을 쥐어주는 것이다. 희뿌연 여명의 틈새에 폭동진압 훈련이란 걸 했으니 이상한 일이다. ‘찔러→ 찔러→ 길게 찔러’의 순서는 같은데 동작이 달랐다. 주번사관의 구령마다 허공 높이 총부리를 올렸다가 내리찍는 위압적 동작으로 변신한 것이다.
나는 그 폭동진압 훈련 대열에 없었다. 작대기 세 개 상병 직후 취사병으로 보직이 바뀌면서 그 훈련을 면제받은 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즈음 하루에 한두 번씩 비상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병사들 모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단무지와 명태를 자르고 카레 묻은 밥솥만 닦으면 하루가 마감되었으니 편안한 보직이다.
어느 날 취사장 앞에서 술 취한 사병 둘이서 티격태격 다투는 중이었다. 3중대 소총수 시절의 같은 막사 내무반 전우들로 나와 짬밥 날짜가 비슷한 동기들이다. 손을 문지르며 취사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멱살 잡은 사병들을 비린내 풍기는 손으로 가로막으며 사이를 벌린다. 잘만 버티면 싸움이 끝날 것도 같았는데.
위이이이잉
비상 싸이렌이다. 그 순간 멱살잡이 군인 두 사람 모두 소매를 털며.
또 데모야.
시키들 쥑여뿌린다.
싸우던 군인 둘이 순식간에 합체되어 막사로 달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태권도 준비 체조하던 군인들도 완전군장으로 몸을 바꾸며 시불시불 연병장 집합이다. 그다음 장비 점검이다. 암호를 잊었거나 배낭끈이 흘려졌거나 수통에 물을 채우지 못한 사병들이 엎드린 채 빠따를 받으며 독기를 키운다.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상이 걸렸고 그때마다 병사들은 증오심에 불탔다.
‘잠 좀 자자. 데모 좀 그만하라구.’
'데모대가 괴롭힌다. 본때를 보여줘여지.'
그렇게 시위대를 증오하던 10.26이 지난 6개월 후, 광주의 비극도 일어나면서 또 계엄이 터졌다.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이 총을 든 채 아스팔트를 치달렸고 맞서 싸우던 청년들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새벽 도청에서의 마지막 총격전이 끝나면서 마지막 살아남은 청년들이 굴비처럼 수감되었다. 신군부 정권이 서슬을 세우면서 그 후 오랫동안 어두운 터널에서 살았다.
그리고 47년 세월이 빛의 속도로 지났다. 수상한 세월이지만 성공한 자본주의가 도래했고 민초들도 비행기 타고 물 건너 여행에 익숙한 세상 즈음이다. 그리고 나 혼자 초저녁 잠에 빠진 정년퇴임 6년차 초로의 삭신이 되었으니 세월이 빛의 속도이다. 그런데 핸드폰 벨 소리다.
밤 11시. 술 취한 칭구겠지, 하며 무심히 받았는데.
“비상계엄이야.”
웬 홍두깨.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킨다. 게임이 아니라 계엄이라니, 그 옛날 ‘서울의 봄’이 아니라 ‘서울의 밤’ 사태가 터진 것이다. 그 밤,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헬리콥터가 굉음의 프로펠러로 국회 옥상에 내려앉았고 유리창 깬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45년 전 악몽이 벌떡 떠올랐다. 여차하면 아수라장이 될 판이므로 두근두근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행이랄까, 군인들은 45년 전보다 순화되었고 진압 과정의 고뇌도 보였다. 쓰러질뻔한 시위대를 막으면서 등허리를 두들겨주었고 떠나면서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장병도 보였다. 마찬가지였다. 부모 같은 시위대도 군인들을 향하여 '지켜줘서 고마워요' 손바닥 펼쳐 빠이빠이 흔들었다.
어금니 깨물며 민초를 떠올리는 신새벽, 그 후 며칠의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 위정자들의 화법이 바뀔 때마다 탄핵 스토리가 롤러스케이트처럼 몇 차례 뒤집어지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진눈깨비 희끗한 12월 초, 놀란 가슴 다독이던 그 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