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완길 월남전 민간의료단 참전인
정부 공모에 선발돼 파월 민간의료단으로 참전
2년 동안 죽음을 무릅쓴 임무로 표창장, 포상 받아
‘비군인 참전 유공자’ 찾는다기에 서류 모아 제출
국방부, ‘한국군 파월전투부대 소속 아니다’ 미해당 통보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 1968년 봄, 서른한 살의 곽완길씨는 보건직 지방공무원으로 충북도립 청주병원 검사실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주관 주월 민간의료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돼 월남에 파견됐다. 그리고 2년간 사선을 넘나들며 의료단으로 임무를 다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88세가 된 그에게 돌아온 건 ‘참전 유공자’가 아니라는 것. 오로지 ‘명예’를 되찾기 위한 그의 세월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주>
○... 1968년 7월 11일 월남으로 넘어가다
선발된 의료단은 육군 의감을 지낸 백창기 단장을 중심으로 4개 반으로 구성됐고, 한 팀당 의사 2명(내과, 외과), 간호사 3명, 의료기사 2명(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영어통역관 1명 등 총 8명으로 조직됐다.
7월 11일, 의료단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월남국제공항 탄손누트에 도착, 모래주머니로 만든 초소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는 사이공 시내 조그만 호텔에 짐을 풀었다.
에어컨도 없이 후텁지근한 방 벽엔 울긋불긋 도마뱀이 찍찍거리며 돌아다녔고 화약 냄새인지 피비린내인지 월남만의 독특한 냄새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본부 직원들이 사다주는 바나나나 과일, 음료수와 술 등으로 구토를 이겨냈다.
일주일 뒤 곽 씨는 방사선사인 김병욱씨와 함께 첫 임지인 푸봉시로 떠났다. 푸봉시 주민들은 대부분 몬타니안족으로 우리나라 면 소재지 정도의 조용한 도시였다.
의료기관이라곤 의료단이 근무하는 병원이 유일했고 환자들은 말리리아, 페스트 등 급성전염병이 많았으며 아침에 출근하면 병원 마당에 아래만 가리고 소쿠리를 짊어진 여인네들이 모여 있곤 했다.
푸봉시에서 1년간 근무하며 한차례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으나 큰 사고 없이 임무를 마쳤다.
○...1년 연장 근무 자원, 쭝띠엔시로 향하다
1년 더 연장근무를 하기로 하고 한 달간 유급휴가를 얻어 귀국했다가 새 근무지 쭝띠엔시 성립병원에 부임했다.
그런데 쭝띠엔시는 앞서 푸봉시와는 달랐다. 완전한 전쟁터였다.
공항엔 대형 수송기가 계류해 있고 100병상 이상의 병원 건물 벽은 여기저기 탄흔이 역력했다.
의료단원들은 부서별로 배치돼 고문관 자격으로 현지인 교육 임무를 맡았고 곽 씨는 검사실 총 책임자로 군인과 민간인 6명을 교육시켜 현장에 투입했다.
이곳에선 베트콩이 많은 인근마을에서 로켓포를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나 싶으면 어김없이 부상자들을 실은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끊임없는 부상자 행렬로 지쳐가는 중에도 ‘박시따이한 또드람’(한국의사 최고) 소리에 열심히,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위선양한다는 자부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때로 베트콩 환자가 섞여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곽 씨를 비롯한 의료단에겐 그저 환자일 뿐이었다.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만든 숙소에서 생활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공습의 불안에 떨었다. 게릴라 전투를 펼치는 베트콩들을 피해 순회진료를 다닐 땐 숨겨가지고 다니던 한 자루의 권총을 큰 위안으로 삼으며 아슬아슬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부자나라 미군 보급창의 지원을 받아 현대화된 검사실 장비에 걸맞게 현지 의료인들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미군병사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적십자사의 혈액은행제도를 건의‧도입, 월남에서 혈액은행의 기틀을 잡기도 하는 등 보람 있는 일도 많았다.
○... 표창장 받으며 귀국 후 50년 흘러
1968년 7월 10일~1970년 7월 10일 만 2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연장하고 더 근무하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지만 가족과의 약속도 지켜야 했다.
그리고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떠나올 때 월남 의사들이 선물한 대형 도자기, 검사실 직원들이 월남의 풍경을 그린 작품에 각자의 이름을 적어 선물로 준 나무판자, 귀국하고 보내온 월남보사부장관 표창장과 쭝띵성장 표창장은 아직도 거실에 잘 보관돼 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다.
그만큼 민간의료단으로서의 월남전 참전은 곽 씨에겐 또 다른 삶의 궤적이었고 육신은 하나지만 두 인생을 살아낸 자부심이었다.
○...참전 유공자를 찾습니다
그러다 2018년 5월께 팔순의 나이에 또 하나의 신문기사를 봤다.
바로 청주시민신문에 실린 공고였다. ‘6.25 또는 월남전에 군인 아닌 신분으로 참전하신 유공자를 찾습니다. 국가보훈처로 신청하세요’라는 내용이었다.
귀국 후 직장생활과 사회봉사를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한 번도 내가 국가유공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에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충북보훈지청에 전화를 걸어 필요한 대로 참전 사실확인신청서, 인우보증서, 주요 활동내역서, 표창장, 참전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13매 등을 구비해 제출했다. 직원은 완벽하게 갖춰왔다면서 한 달 후 국방부에서 회신이 올 거라고 걱정말라고 했다.
회신이 왔다. 내용은 ‘베트남 전쟁 참전 인정 기준은 한국군 파월전투부대 소속인 경우에 한한다’며 ‘보건복지부 선발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에서 공모를 냈을 때는 정부 부처간 협의가 있었을 텐데 ‘국방부 관할 군사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기에 미해당’이라는 국방부 판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방부 파견 연예인 위문단은 국가유공자이고 보사부 파견 의료인단은 국가유공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곽 씨는 손발이 맞지 않는 국가부처간 행정력 부재가 허망했다.
○... 명예만 되찾을 수 있다면
또 그렇게 5년이 지나 2023년 보훈청이 국가보훈부로 승격하며 대통령이 보훈대상자를 한 사람도 놓치지 말고 찾아내 대우하라는 담화를 발표하는 등 희망이 보여 다시 한번 보훈지청을 찾았다.
예전과 규정이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직원이 권유한 마지막 방법으로, 2024년 10월 또다시 참전사실 확인신청서를 준비해 국민권익위원회에 행정심판청구서를 제출했다.
한달여가 지나고 돌아온 회신은 여전히 ‘비해당’이었다.
단, ‘단서’가 붙었다.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90일 이내에 재청구하라’는 것.
곽 씨는 그 ‘단서’에 희망을 걸고 다시 해보려 한다.
그는 1938년 청주 출생으로 세광고와 청주대 법대를 졸업하고 건강관리협회 충북지부 검사소장, 세광고 총동문회장, 충북도 야구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1녀2남 자녀들은 다 출가시키고 아내 김계숙(82)씨와 함께 자택(서원구 청남로 2024번지. ☎010-8845-5010)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지난 5년여, 특히 국가공무원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그는 “겉으론 민원인을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귀찮은 업무 책임 떠넘기기였고 지청장 면담 요청도 소용없다며 거절했다. 권익위 회신에서는 나를 ‘고인’이라고 칭했다. 서류조차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국민을 위한다는 관청 직원들의 상투적 민원 대우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월남에서 돌아와 열심히 산 덕분에 먹고 사는 덴 지장이 없다. 내 나이 여든여덟, 이 나이에 내가 참전명예수당 몇 푼 받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 나름 국위선양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선을 넘나들며 임무를 마친 것에 대한 ‘명예’를 되찾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곽 씨는 “그때 함께했던 동료들중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안다. (내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사망한 사람들의 명예도 찾아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라며 담담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