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 관장

▲ 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 관장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무협지는 독서의 근본이었다. 중국과 대만, 한국 작가들의 무협지를 읽는 이들 속에서 조금 더 어른스러운 이들은 ‘대망大望’이라는 일본책도 읽었다. 36권이라는 엄청나게 긴 책이었지만,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서 무협지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원래는 일본 역사 소설의 모음집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 전국시대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사를 잘 모르는 이들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한번 들어봤을 법하다. 오다 노부나가가 시작한 전국시대 통일의 길은 오사카성大阪城을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임진왜란 도중 사망하여 결국 도쿠가와 이야에스에 의해 도쿄를 중심으로 한 에도막부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삼대장은 바로 이 세 명을 가리킨다.
오늘 이야기하는 다케다 신겐은 이들의 뒤를 잇는 4번째의 인물이다. 그는 야마나시山梨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야마나시는 충청북도와 마찬가지로 바다에 접해 있지 않다. 또한 후지산의 북쪽에 접해 충청북도와 같이 수려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다. 야마나시의 서쪽은 교토, 오사카, 나라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 지방이며, 그 동쪽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방이다. 야마나시는 그 중앙에 위치해 양 지역을 잇고 있다. 야마나시는 예부터 가이甲斐라고 불렀는데, 다케다 신겐의 별명은 ‘가이의 호랑이’였다. 전장에서 기병을 활용한 그의 전술은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던 오다 노부나가 역시 다케다 신겐만큼은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왜 그에게 일본에 살지도 않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는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명은 그의 생김새에서 유래했다고 생각되는 ‘대머리쥐’와 ‘원숭이’였다. 무서운 호랑이보다 원숭이가 더 영특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다케다 신겐은 1521년 11월 3일 태어났다고 전한다. 당시 다케다 가문은 이마가와今川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승리가 천대에 이른다는 의미의 ‘가츠치요勝千代’라는 아명이 붙여졌다. 무로마치 막부의 제12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는 어린 다케다 가츠치요에게 ‘하루노부晴信’라는 이름을 내려 주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불교에 귀의한 뒤 받은 법명인 ‘신겐’이다.
그는 고이시긴碁石金이라는 일본 최초의 금화를 주조하였다. 가이에는 풍부한 금광이 존재하였고, 서양인에게 받아들인 채굴과 정련 기술을 바탕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얻었다. 이렇게 얻어진 금은 고이시긴으로 만들어져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정보 수집을 중시했다. 미쓰모노三ツ者라고 불리는 비밀 첩보조직을 만들었고, 아루키미코歩き巫女라고 불리는 닌자술을 배운 여아를 육성해 첩보 활동을 했다. 가이에 앉아 일본 전역의 정보를 다 알고 있다하여, 발이 넓은 주지스님이라는 의미의 아시나가보즈足長坊主라는 별명도 그에게 붙었다. 아마도 이러한 재력과 정보력은 다케다 신겐이 항상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죽는다. 그는 1582년 6월 2일 밤, 호위군 100여명만 이끌고 교토의 혼노지에서 잠을 청하였다. 그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는 교토의 열병식에 참여하기 위해 군사를 이동한다고 거짓 보고하고 급작스레 혼노지를 습격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자결하였는데, 실제 그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일본 만화 등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지옥에서 다시 돌아오는 무서운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년도 그리 평안하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격파하여 권력을 장악한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중 죽음을 맞이한다. 화려한 무덤을 만들었지만, 조선에 출병한 왜군들에게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기 위해 장례를 치루지 않았고, 어린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에게 권력을 이양했지만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쿠카와 이야에스에게 패배하며 히데요시 가문은 몰락하고, 그의 무덤 역시 파괴되고 만다.
최종 승리자였던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말년을 보냈지만, 전국 4대장이던 다케다 신겐의 말년은 이 네 명 중 가장 허무하게 끝난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 중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53세에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신에 갑옷을 입혀 스와호諏訪湖에 수장하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이 때문에 스와호에는 신겐의 수중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986년 스와호의 바닥에서 마름모 형태의 무언가가 확인되었고, 수년에 걸친 조사 결과 무덤은 아니라 결론 내려졌다. 과학적 조사보다 사람들의 믿음이 강해서일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스와호의 깊은 물 속에서 다케다 신겐이 그의 갑옷을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야마나시현립박물관에서 다케다 신겐을 연구하는 에비누마신지海老沼眞治 선생은 특별전을 준비 중인 나에게 다케다 가문에 대한 자신의 책을 선물했다. 또한 우리에게 수장고에 보관 중인 금화를 보여 주었다. 바로 고이시긴이었다. 다케다 신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금화는 9월에 개최될 ‘후지산에 오르다, 야마나시’ 전시에 출품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우리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망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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