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노자의 도덕경에는 “남을 잘 아는 것을 지혜롭다고 하고 나를 잘 아는 것은 현명하다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어 노자는 “남을 이기면 힘이 세다고 하고 나를 이기면 강하다고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세상이 내 뜻과 같지 않을 때 마음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는 분노로 남을 적대시하며 공격하는 태도다. 둘째는 지혜로 남을 더 이해하여 잘못됨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다. 셋째는 현명함으로 나를 잘 알고 더 높은 정신으로 도약하는 초월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 번째 길은 범인이 달성하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앞의 두 개의 길, 즉 분노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지혜의 길을 갈 것인지가 문제다.
최근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온갖 책들은 분노 세대, 불안의 세대가 출현했다고 말한다. 교보문고의 평대 위에 놓인 책의 제목만 보아도 불안과 우울, 무기력, 외로움과 같은 단어가 차고 넘친다. 동서고금의 저자들은 자기가 인간의 위기를 치유하겠다고 나서지만 사실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립되고 외로운 인간은 그 자체로 위기이기 때문에 어떤 조언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쓸모 없음 자체를 저주하게 된다. 그런 감성이 집단화되면서 국회는 물론이고 광장에서도 온갖 욕설과 저주가 넘쳐 난다. 그 마지막 절정은 26일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피청구인의 최후 진술 장면에서 나왔다. 우리 사회가 온통 간첩으로 가득 차 곧 망할 것이라는 저주다. 북한 지령으로 야당과 시민사회가 행동한다는 진단은 우리 사회가 곧 내전으로 진입해도 이상할 것 없다는 뜻 아닌가. 아무리 지금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지만 이런 식의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게 되면 국가공동체는 자기 파괴의 길에 본격적으로 진입한다. 시민이 시민을 스스로 감시하는 내전의 전 단계에서 국가는 시민에게 “너는 누구냐”고 심문하는 대심문관이 된다. 시민은 적이냐, 동지냐를 심문당하면서 전체주의에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시민은 선동에 취약한 군중으로 전락하게 된다. 의심과 편 가르기가 본격화되면서 배제와 차별이 뒤를 잇고 더 심하면 충돌의 단계가 기다린다.
분노는 내전을 향하지만 지혜는 통합을 향한다. 무엇이 지혜인가. 권력과 책임을 분점하고 정치의 양극화로부터 탈출하는 힘이다.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을 보면 누가 악인인지가 확실치 않다. 아무도 게임 참여자에게 죽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을 두 패로 가르는 게임의 규칙과 시스템 자체가 괴물이다. 지금 한국 정치 역시 양극화를 촉진하는 사악한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다. 흔히 언론에서 말하는 중도층이라는 개념도 지금은 좌와 우의 폭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계층을 지칭한다. 게임 참여를 거부하는 계층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적대적 갈등과 대립으로 탈출하기 위해 시스템을 바꾸는 지혜로운 행동, 즉 개혁에 눈을 뜨게 된다. 사람을 보지 않고 시스템을 보는 관점이 바로 지혜다. 적과 동지를 가르며 난장판이 된 한국 정치에 실종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한 가닥이라도 잡고 늘어져 어떻게든 한 자리 차지하는 데 눈이 먼 정치인들에게는 이런 지혜의 맑은 눈을 가질 수 없다. 또다시 예고되는 분열의 시대에 분노 세대는 더욱 극단적 이념에 경도되며 지혜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내란과 폭동을 잠재우고 난 이후의 한국 사회는 더욱 견고하고 강해진 민주적 시스템에서 새로운 비전을 찾아내야 한다. 이 과업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바버라 F 월터의 최근 번역작인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추천한다. 내전은 우리 곁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