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은 지난 24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4년간 미국에 210억달러(약 31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감사를 표하고 트럼프 2기 출범 후 그가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관세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현대차그룹의 헌신적이고 구국적인 대미 투자 결정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이번의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꼭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정책이 오직 관세정책 하나뿐인 양 관세부과 카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고 있다. 마약 밀반입을 이유로 주변국인 캐나다와 멕시코는 물론 중국까지 겨냥해 관세폭탄의 포문이 열린 이후 세계의 눈과 귀는 온통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몰려있다.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벌이는 이 관세폭탄 놀음에 세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대립과 갈등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똑똑히 보았다. 2차세계대전 직후 국제사회는 항구적인 세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국제연합을 창설했고, 국제간의 무역장벽 완화와 자유무역 확대를 목적으로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체결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창설되면서 GATT 체제를 대체했으며, WTO는 관세 및 비관세장벽을 완화하고 자유무역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을 기치로 하는 UN도 자유무역의 새로운 질서를 부르짖는 WTO도 초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심하게 흔들려 온 것 역시 사실이다. WTO 기능과 관련하여 미국이 WTO 산하의 분쟁해결기구(DSB)의 상소위원 임명 동의를 거부하는 등 WTO 자체의 존립 위기를 초래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1기와 2기에 걸쳐 WTO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WTO의 최우선 과제인 관세 철폐에 역행하는 관세폭탄이라는 수단을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 쓰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약육강식의 원칙이 지배하는 정글의 야만(野蠻)으로부터 절제와 공영을 가치로 하는 문명(文明) 증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힘만을 믿고 상대를 제압하려는 어리석음을 ‘야만’으로, 힘의 사용을 절제하고 평화와 공존 번영을 위한 노력을 ‘문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불협화음이 들리긴 하지만 인류가 하루 또 하루 문명 사회를 향해 발전해나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일단의 그룹들이 이 도도한 문명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단 관세폭탄만이 아니라 다양한 수단으로 대통령의 야욕을 채우려 시도하고 있으며, 이를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포장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도 하기 전에 파나마운하와 그린란드를 언급하며 영토확장 야욕을 드러내는가 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이유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세계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모두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고양이가, 미국이, 너무 큰 힘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 세계는 리더십의 부재, 가치의 혼란 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의 수렁에서 간신히 벗어나 이제 좀 기지개를 켤 찰나에 나타나 기존의 가치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불허 정치가 인류를 두려움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문명을 거스르고 야만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야만의 시대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절대 다수를 무기로 의회를 독점하고 국정방해를 일삼는 절대 야당과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집권 여당, 그리고 소통을 버리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이 서로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나라와 국민을 어지럽히고 있다. 어디 한 구석에서도 절제도, 양보도, 공존도 보이지 않고 야만만이 판을 치고 있다.
나라 안팎이 온통 야만(野蠻)의 시대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