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호 시인, 시집 『설탕이니까』 출간
이번엔 누구 차례지 한 사람씩 나오라고 해 꽃잎 뒤에서 손 내미는 늙은 재봉사가 된 화가
꽃밭이야 꽃밭 직업을 들키지 말기를
이렇게 많은 꽃집을 누가 만들어 놨니 카드에 써놓은 시가 맘에 안 들어 빗물은 새지 않았으면 좋겠어
화가가 된 도배사가 두통이 온 틈을 타 도배사가 된 시인이 토시를 꼈다 시계는 꽃집에서 가장 느리게 가는 것으로
불량 산소를 다 빼고 진공상태로 다락방에 올라갔다 귀를 막으면 파도를 만드는 어머니의 손가락
겨울은 바다지 바다는 열여덟 시간짜리 무료주차권 그래서 오늘은 며칠 된 시인의 꿈을 입힐래
「도배사가 된 시인의 유통기한」 부분
리호 시인의 시집 『설탕이니까』가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됐다. 첫시집 『기타와 바게트』(문학수첩, 2020) 이후 5년 만이다.
첫 번째 시집에 이어 본격적으로 마법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데, 마법의 아우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한 편 한 편의 작품들이 모두 신비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시인은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과 사유에 몽상과 환상의 힘을 발휘해 뜻밖의 놀라운 상황과 요소들을 결합함으로써 진부한 일상에 경이로움을 산출한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는 현상, 그리고 봄이 되어 천지에 꽃들이 만발하는 현상 등은 어떤 숨어 있는 놀라운 힘의 발현이다.
리호 시인이 2025년 전의 자신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지구별과 은하적 세계의 차원을 도입하는 등의 시적 발상을 보이는 것은 시인의 시적 충동이 어떤 근원적인 세계와 닿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시집에는 몽상가라든가 꿈과 해몽, 그리고 마법사라든가 마녀, 주술이라든가 주술사 등의 어휘들이 바둑돌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시집 전체를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시인은 이 세상을 마법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신비한 곳으로 간주하고 수시로 그 통로를 발견하기 위해서 탐색한다. 그것은 때로는 꿈이기도 하고, 몽상이기도 하며, 계절의 변화라든가 자연의 신비, 혹은 미각과 같은 감각의 미묘한 국면이기도 하고 감정의 절묘한 지점일 수도 있다.
2025년 전 2100광년 떨어져 있는 M2-9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파인애플을 먹다가 지구에 불시착한 리호 시인은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기타와 바게트』,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 청소년을 위한 디카시 창작 입문서 『찍go 쓰go 디카시 창작 입문』 등이 있다. 이해조문학상, 디카시작품상을 수상했다. 절친한 친구로는 곰과 지구 양 세 마리와 토끼 한 마리가 있다.
도복희 기자 phusys2008@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