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세복 시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미완성의 걸작'이라는 단원이 있다. 「윤두서의 초상화」를 보고 한 평론가가 미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예술 비평문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귀는 그리지 않았고 상체는 사라진 미완성작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화가의 치열한 고뇌의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글이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교사 차원의 교육 과정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미완성의 걸작' 단원을 선택하여 심화 학습의 하나로 수행평가를 실시하였다. 국어 시간에 미술 비평과 관련된 활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인문학과 예술의 융합적 사고를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평소 필자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실로 다양한 동서양의 명화를 가져왔다. 김홍도의 「서당」을 가져오기도 하고,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가져오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가져오는가 하면, 피카소의 「우는 여자」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칠칠치 못한 학생은 있기 마련이다.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은 학생은 약간의 감점과 함께 교사가 준비한 그림으로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필자는 세 작품을 준비하였다. 뭉크의 「자화상」,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전혁림의 「통영항」이 그것이었다. 그 학생은 전혁림의 「통영항」을 골랐다. 뭉크의 작품이나 몬드리안의 작품이 비교적 난해하기에, 어촌의 포근함이 묻어나는 전혁림 화가의 그림을 고르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였다.
수행평가가 끝나고 결과물을 교무실로 가져가 채점을 하였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였다. 이 세상에 긍정적인 학생이 부정적인 학생보다 수십 배가 많은 건 당연하다. 모두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림의 위대함을 서술하였다.
그러다가 「통영항」을 골랐던 그 학생의 답안지를 읽는 순간, 전혀 생각지 못한 감상에 당황하였다. 그는 그림이 무섭다고 하였다. 바다도 파랑, 산도 파랑, 하늘도 파랑이고 그 안에 담긴 마을의 풍경과 어선의 모습이 뒤죽박죽된 듯 어지럽다고 감상을 남겼다.
학생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감상을 정성껏 한 게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학생은 말했다. 그림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의 감상을 천천히 잘 적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림이 무섭더냐고 물었다. 또 그렇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던 필자는 물었다. 통영항이 어디인지 아느냐고 말이다. 모른다고 했다. 아울러 자신은 제목보다 그냥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을 적었다고 답했다.
롤랑 바르트라는 철학자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저서를 남기며 작가의 전기를 중시 여기는 역사주의와 고별을 선언하였다. 작품이 발표되는 순간, 저자는 사라지고 텍스트만 남으며 독자가 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해석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야말로 다원화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필자는 학생을 돌려보냈다. 그는 어떠한 배경 지식도 없이 작품을 감상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떠했는가. 「통영항」의 제목으로 작품을 해석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더 나아가, 수업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이라고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학생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필자는 그 학생의 답안지를 선입견 없이 다시 읽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