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용 수필가

▲ 김향용 수필가

지난 주말 수안보 온천을 다녀왔다. 몸이 찌뿌듯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누가 부르기라도 하듯이 고향으로 달려간다. 목욕탕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가족이 이곳으로 처음 오게 된 것은 지금부터 62년 전 내가 네 살 때 일이다. 아버지는 친구분이 맡은 온천수 찾는 작업을 하기 위해 우리보다 두 해 먼저 서울에서 내려와 양수기 기술자로 일하고 계셨다. 일 년이 조금 지나 무슨 영문인지 아버지의 소식이 뜸 하자, 엄마는 무작정 오 남매를 데리고 주소만 가지고 수안보로 떠났다. 초등학교 5학년인 맏딸 언니 아래로 동생들은 고만고만했다. 막내 남동생이 엄마 등에 업혀 있었던 기억으로 겨우 돌이 지나지 않았나 싶다. 이삿짐은 엄마 머리 위 이불 보따리 속에 요강, 숟가락, 밥솥단지가 전부였다. 올해 아흔넷인 엄마는 그때 힘들었던 이야기를 가끔 하신다.
낯선 곳에 엄마 손 잡고 오빠들 뒤를 따라 걸었던 길은 긴 둑길이었다. 다리 옆 커다란 수양 버드나무가 있었고, 둑길 따라 미루나무가 곧게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길은 80년, 90년대까지 온천 하러 온 사람들에게 수안보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은 토산품을 팔던 도깨비시장이었다. 우리 집은 양지 말 맨 끝 옥화네 사랑방을 얻어 일곱 식구가 살기 시작했고, 나의 고향이 되었다. 반갑게도 지금까지 그 집은 식당으로 바뀌어 그 터에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유년 시절 소꿉친구들과 놀던 추억을 되돌아보게 해서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온천수가 드디어 개울 한복판에서 펑펑 솟아올랐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놀랐다. 어떻게 땅속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 나오는지 신기하다며, 마을 어른들은 넓은 송판으로 대충 울타리를 만들어 간이 목욕탕을 만들었다. 지붕 없는 목욕탕은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이 온천수가 나오기 전에도 (구)수안보관광호텔 앞에는 일본식 건물에 대중목욕탕 ‘안보탕’ 이 있었다. 남탕, 여탕, 독탕이 있었고, 탕 안에는 용머리 형상의 입에서 물이 나오게 만들어 어릴 때는 무섭기도 했다.
수안보는 80년대 신혼여행지로도 유명했다. 마을에서 한복 입은 신부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물은 양손으로 받아 볼 때는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탕에 가득 담긴 물빛은 연한 하늘색으로 보였고, 삶은 달걀 냄새가 나기도 했다. 온천수 성분이 약 알카리성에 유황 성분이 있다는 소문이 전국에 돌자 피부병 환자나 위장병 환자들이 찾아와 몇 달씩 머물러가며 병을 고쳐가곤 했다. 또 수안보초등학교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내에 목욕탕이 있어 학년별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목욕했던 기억도 난다.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에서 모터 양수기 기술자로 일한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다 김씨네’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모다 김씨네’ 막내딸이 되었다.
내 고향 수안보, 해마다 꽃피는 4월이면 수안보온천제(11~13일)가 열린다. 석문천교에서 (구)수안보중학교 올라가는 길에 만개한 꽃 대궐은 수안보를 찾는 사람들에게 고향의 봄을 선물한다. 70년대 초 선배들이 심은 벚나무가 또 하나의 명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게 어찌 고향의 봄뿐이랴. 따끈따끈한 온천수에 몸을 풀면 도시에서 엉겨 붙은 공해가 녹아내리고 몸도 마음도 새 힘을 받는다.
세월 속에 선배들은 나이를 먹고 나무도 고목이 되었다. 땅속에 내린 뿌리는 고향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울퉁불퉁 상처 난 기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새 봄날에 내 고향 수안보로 초대장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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