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윤 수필가

이호윤 수필가
이호윤 수필가

4월이다. 꽃샘잎샘 바람을 헤치고 숨 가쁘게 달려온 봄이다. 어떤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저 시구에 지나지 않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기나긴 망각의 겨울을 지나 생명이 움트는 4월, 상실의 기억은 잔인하다. 그 봄에 나는 물기 어린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은 채 펄떡펄떡 뛰는 봄의 심장을 망연히 바라보았었다. 시선 한가득 파릇파릇한 잔디가 쏘아 올리는 힘찬 생명력을.

겨우내 입었던 두꺼운 외투들을 세탁소에 보내려고 큰 가방에 담았다. 봄옷들을 꺼내어 걸고 신발장도 열어서 훑어본다. 한 귀퉁이에 서 있던 어두운 색깔의 우산들 뒤로 옅은 분홍색 천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손을 뻗어 끄집어내고 보니 엄마의 양산이다. 손바닥이 비쳐 보일 만큼 얇은 연분홍 천에 예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고 가장자리엔 흰 레이스가 두 겹으로 달려있다. 아담한 체구에 수줍은 듯 살며시 미소를 짓던 엄마를 보는 듯하다. 3단으로 된 양산을 차곡차곡 접어 단추로 고정하는데 자그마한 것이 가볍기도 하다. 매끄러운 목재로 된 앙증맞은 손잡이를 가만히 쥐고 있자니 병환으로 나비처럼 가벼워졌던 엄마가 떠올라 코끝이 찡하다.

엄마의 양산을 바꿔드리는 것은 언제나 동생이었다. 철마다 옷과 신발도 사드리고 여름엔 양산을, 겨울엔 따뜻한 털이 들어있는 보드라운 가죽 장갑을 준비해드렸다. 동생은 엄마의 치수도 취향도 잘 알았다.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로, 직장에 매여있다는 핑계로 나는 남의 일 보듯 구경만 했다. 아니 애써 눈을 감았다.

분홍 양산은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손잡이는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 엄마는 손수건이며 양산 같은 것들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당신 물건이 수명을 다하는 날까지 소중히 다루고 아껴 쓰셨다. 내가 엄마를 만나러 간 날, 엄마의 낡은 양산을 발견하고 새로 사드린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마침 동생은 여행 중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유품을 정리할 때 분홍 양산이 내게로 왔다. 내게 온 지도 벌써 6년이나 되었다. 6년 동안 햇볕 한번 못 쐬고 어두운 신장 안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차마 꺼내어보지 못하는 엄마의 기억처럼.

동생은 아직도 눈물 없이 엄마의 얘기를 하지 못한다.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며 엄마를 추억하는 동생이 나는 부럽다. 엄마랑 쇼핑하던 일, 엄마랑 소바 먹으러 간일, 목욕탕 갔던 일, 꽃구경 간일, 네일숍에 간 일. 동생의 추억엔 끝이 없다. 초라한 내 마음엔 엄마의 웃음이 사진처럼 남아있을 뿐인데. 내 텅 빈 추억의 방엔 휑한 바람만 불어 시린 내 가슴은 아무 말도 토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양산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내일은 동생을 불러내어 엄마가 좋아하던 소바를 먹으러 가야겠다. 동생은 양산을 안 쓰니 운전할 때 끼는 얇은 장갑도 사주어야지. 커피는 엄마한테 가서 마셔야 한다. 엄마가 좋아하던 커피를 놓아드리고 동생과 함께 수다 떠는 모습을 봬드려야지. 동생이 들려주는 엄마 이야기는 가슴이 아픈데도 자꾸만 듣고 싶어진다.

돌아오는 길엔 또 가슴이 먹먹하겠지만 아직은 엄마를 놓아드리고 싶지 않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아파하면서 엄마와의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기억 저 끝 어딘가에 있을 옛 추억의 조각들도 찾아질 것이다. 추억의 힘으로, 사랑으로 나는 다시 울고 웃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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