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은 선득하다. 그래도 봄이다. 아파트 저층인 내 집 베란다에 해가 들면 봄이 온 거다. 그동안 손보지 않았던 베란다 화초를 손보기로 했다. 봄인 듯 갑자기 더웠다가 눈‧비 내리고 황사에 폭풍까지 종잡을 수 없는 날씨를 잘 이겨내고 활짝 꽃피운 군자란이 대견하고 미안했다. 동백은 일찌감치 꽃을 피워 겨울 베란다를 밝히더니 금세 꽃을 떨구고 침묵에 들어갔다. 그러면 나도 동백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겨울 화단을 잊고 마는 것이다.
분갈이를 위해서 꺼내 놓는 삽과 화분과 부엽토, 마사를 꺼내 놓고 나면 베란다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번잡하다. 해마다 분갈이할 때마다 화분 수를 늘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지만 하나둘 야금야금 개수가 늘어나 가을 끝엔 베란다가 가득 차게 된다. 하찮게 생각하던 욕심이 나를 옥죄게 하는 줄 알면서도 거듭되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오전 내내 이제 절대로 반려식물을 들이지 않겠다고, 반려자 필요 없이 혼자서 편히 살겠다 결심하며 푸석거리는 부엽토 먼지를 뒤집어쓴다. 반려견과 스무 해를 살다가 지난가을에 보냈다. 오래 같이 살면 모든 것들이 반려(伴侶)가 된다. 동물도, 식물도, 그릇도, 필기구도 모두 반려가 된다. 늘 이별은 힘든 거라서 반려를 마음에 들이지 않으려 한다. 일찍 끝날 줄 알았던 분갈이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허기에 지쳐 점심을 먹고 다시 손을 대려 하니 부아가 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정작 내가 하려는 것은 동백나무의 분갈이였다.
어머니가 너무나 좋아하셨던 동백이다. 다른 것은 집에 오는 손님에게 몇 개씩 들려 보내기도 하지만 동백은 내어줄 맘이 없는 또 다른 반려식물인 셈이다. 어머니도 나도 애지중지하던 동백 화분에 누가 슬그머니 둥지를 틀었다. 언제 뿌리를 내렸는지 하늘매발톱이 한겨울도 가뜬히 이겨내고 점점 키를 키우더니 꽃을 피운 것이다. 물을 줄 때마다 잡초처럼 뽑아 버리려 하다가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두었다. 매발톱은 어디서나 잘 사는 식물이다. 꽃도 예쁘고 색채도 다양하다. 어느 화단에서나 잘 적응하고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안다. 매발톱의 꽃말이 믿을 수 없는 사랑인가 뭐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매발톱은 자신과 같은 꽃가루에 수정되기보다는 다른 것에 수정되어 변형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꽃의 색도 모양도 다양하다. 사람으로 치면 화냥기가 다분하다고 해야 하나? 꽃말이야 어쨌든 동백 곁에 둥지를 튼 녀석도 참 곱다. 연보라색 꽃잎에 줄기를 곧추세우고 당당히 베란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붉은 동백꽃과도 제법 화색을 맞춘다. 꽃의 뒤쪽으로 촉수처럼 뻗은 것이 매의 발톱처럼 생겨서 매발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매의 발톱처럼 제법 날카롭게 생기기도 했다. 겉을 보고 속을 모르듯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남을 움켜쥐고 상하게 할 것 같지만 그것은 남에게 퍼줄 꿀이 가득한 꿀샘이다.
동백과 매발톱을 분리하려다, 함께 큰 화분으로 옮겼다. 집 없이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하는 가난했던 내 과거가 생각나서 차마 떼지 못하겠다. 꽃도 피웠는데 곧 씨도 여물 텐데 어디로 내보내겠는가. 어린 것을 등에 업고 또 뉘 집 문간방을 찾아가라 하겠는가.
서울이라는 곳의 집값을 보면 내 아이들의 삶도 답답하고 서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든 가서 매발톱처럼 강하게 붙어, 살아내는 힘이 있어야 할 텐데. 그래야 고운 꽃도 피울 텐데….
종일 분갈이 한 화분을 정리하며 한해를 기쁘게 보낼 내 반려들을 바라본다. 반려라는 말의 의미를 또 마음에 담고 피식 웃어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