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문학평론가

▲ 김묘순 문학평론가

고사리를 삶는다. 지난해 부모님 산소 주변에서 꺾어온 고사리다. 독이 있어서 삶고 말리고 다시 불리고 삶는 과정을 거쳐야 먹을 수 있는 나물이다.
가끔, 인간은 고사리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독설을 퍼붓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가끔 반성을 하면서 혹은 반성도 없이 그렇게 살아들 간다. 반대로 고마워할 줄도 안다. 작은 것에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릴 만큼 고마움을 알고, 은혜를 갚아줘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
‘보물섬’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서동주를 둘러싼 갈등의 굴레들을 직면한다. 정의롭지 못하고, 개인의 ‘보물섬’을 찾기 위하여, 아니 자신만의 ‘보물섬’을 혼자서 오롯이 차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죽음의 굴레를 씌우기도 하고, 그 굴레를 쓰기도 하는 인간들. 그 인간들의 가장 밑바닥 모습을 본다. 그 사이에서 애틋한 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마치 맛있는 고사리를 먹기 위하여 법제 방법을 모르는 인간들이 서로를 할퀴며 맞총질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사리의 독을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독을 삭혀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모른다. 그냥 고사리가 처음부터 맛있는 줄 알 뿐이다.
처음부터 맛있는 것은 없다. 처음부터 맛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입맛에 잘 길들어서 그렇다고 생각되는 터일 것이다. 수천 년을 인간과 마주하며 인간을 기르고 친화하며 살아갔을 고사리. 그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고사리는 자를 때 맑은 진액을 내뱉는다. 자신의 운명이 다함을 못내 아쉬워함인가. 아니면 자신의 쓰임새에 맞는 운명을 맞이하게 됨을 받아들이려 땀을 흘리는 것인가.
고사리를 꺾을 때 진액이 흐르는 가장 아랫부분을 으스러지도록 눌러야만 한단다. 그래야 뻣뻣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옥희 언니가 가르쳐 줬다. 그렇게 진물이 나오는 부분을 잔인하게 으스러트린 결과인지 삶아 놓은 고사리가 연하다.
잔인하다. 물방울이 솥뚜껑을 밀어낼 정도로 뜨거워진 물에 생 고사리를 넣고 삶아낸다. 그 뜨거움 속에서 온 몸에 화상을 입힌, 우리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그리고 햇빛에 바짝 말린다. 한 바구니가 한 줌도 안 되게 온몸을 비틀어 모든 진을 다 빼낸 것이다. 이도 모자라 먹을 때 또 삶아댄다.
인정도 없고 몹시 모질다. 무심코, 배운 대로 으스러트려 놓고, 삶고, 말리고 또 삶는 과정을 거쳐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이 글을 쓰며 번뜩 들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냥 무심코 또는 자연적으로 혹은 교육으로 습득된 대로 미안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잘 살아간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약육강식이 당연하고, 인간은 식물을 채취하여 먹고, 동물을 사냥하거나 사육하여 식재료로 삼으니 살아가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라고. 그러니 그렇게 야단을 떨고 수선을 피울 일이 아니라고.
맞다. 그런데 가끔 슬그머니 미안해지는 것을 또 어쩌란 말인가. 미안함을 안고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서 슬프다.
해협은 엎지러지지 않고, 시인은 아픔에 정직해야한다. 그렇듯 우리는 우주 사물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알고 바닷물이 엎지러져 육지로 상륙하지 않듯 그렇게 정직해야만 할 듯싶다.
가묘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봄이 오면 무덤가에서 고사리를 꺾어가라고.
올해도 봄이 온 모양이다. 부모님 산소에 가서 조금은 미안하게 또 고사리를 꺾어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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