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노년의 삶은 한가하다. 신문과 책 읽기로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상허 이태준의 <무서록> 중 ‘만주기행’편에 꽂혔다.
“조선엔 벌써 풀이 돋았겠죠?”
“양지짝 산엔 진달래도 폈을걸요?”
작품 속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를 읽는 순간 나는 문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만주로 이민 간 이민자들이 고향의 봄을 어림짐작으로 유추하며 나누는 언어의 결이 감성을 자극한 때문이다. 나도 30년 가까이 타향살이를 해본 터라 뿌리에서 동떨어진 객지의 외로움이 뼈에 사무침을 잘 안다. 고향이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인 동시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그런 뿌리에서 떠나 만주지역 장쟈워후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들은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고향의 봄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 시대가 시작된 이후 일본 정부는 중국 대륙을 침범할 야심을 드러냈다.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 벌판을 개척할 것을 계획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고 농민들의 농지를 빼앗았다. 농지를 잃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감행했다. 만주는 기차로 종일 달려도 사래 긴 밭들이 부챗살처럼 열리고 접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널린 게 빈 땅이라 부지런만 하면 양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신천지라 하였다. 가난한 조선 백성들이 줄줄이 만주로 향해 1936년경에는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이 89만 명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가는 길엔 먹을 물도 변변치 못해 기차가 서면 물 먼저 찾아 먹어야 했다. 보따리를 낀 사람, 아이를 업은 어미, 어미 치맛자락을 잡고 발에 맞지 않는 큰 신을 ‘철덕철덕’ 끌고 가는 딸과, 전 재산을 걸머진 가장의 보따리에 매달린 바가지 쪽. 이게 조선 백성이 신천지를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이태준 선생은 이런 상황을 만주기행문에서 소상하게 묘사했다. 그리곤 가장의 보따리에 매달린 바가지를 놓고 바가지 예찬론을 폈다.
“조선 사람은 얼마나 저 바가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하나? 바가지로 샘을 푸고, 바가지로 쌀을 일고, 바가지로 장단을 치고, 산모의 첫 국밥도 저 바가지로 먹는다.”
선생의 말씀대로 그들이 한사코 보따리에 바가지를 매달고 가는 건, 밥그릇과 솥도 짐이 되어 챙기지 못하고 떠나온 이들에게는 옆구리에 찬 숟가락만 꺼내면 바가지에 밥을 퍼 담아 가족끼리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임시변통이 가능한 때문이었을 게다. 용도가 이처럼 다양한데 어찌 바가지를 챙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도 하루 한두 번은 바가지로 쌀을 씻어 전기압력밥솥에 안친다. 하늘색 플라스틱 바가지가 내 손에 들어온 건 20년이 훨씬 넘는다. 간수하기 편리하고, 가볍고 만만해 쌀만 씻는 게 아니라 나물을 다듬어 씻거나 감자나 고구마를 씻을 때에도 바가지를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바가지의 귀중함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바가지를 하찮거나 변변치 못한 물건으로 간주해 본 적도 없었다. 아무 때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어서 귀한 줄 몰랐을 뿐이다.
싱크대 아래 칸에서 플라스틱 바가지를 꺼내어 손으로 쓰다듬는다. 비록 플라스틱 제품이지만 오랜 세월 우리 내외 입에 밥이 들어가도록 쌀 씻는 일과 나물 종류를 두루 간섭해 온 시간의 궤적이 고스란히 손의 감촉을 타고 심장에 와 닿는다.
어느새 앞산에는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