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탁 소설가

▲ 최탁 소설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는 특이한 인물이 나온다. 극 중 이름은 부상길인데 시청자들은 그를 학씨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 낼 때마다 학~~씨~ 하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구두쇠이며 꼰대에다가 바람기까지 있다. 시청자들은 그가 나오면 또 무슨 나쁜 짓을 할까, 하고 긴장한다.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 시청자들은 그가 화면에 나오길 기다리고 애잔한 느낌으로 학씨 아저씨라는 애칭까지 만들어 부른다. 미움과 애잔함이 공존하는 특이한 경험이다.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는 악인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추리보다 돋보이는 게 거장의 시선이다. 그는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도 늘 따뜻한 눈길을 준다. 그들을 연민하며 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속사정을 만들어 준다.
감정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천평칭이 있다고 가정하자. 한쪽 저울판에는 미움을 올리고 다른 쪽 저울판에는 애잔함을 올려보자. 부모에 대한 미움과 애잔함을 천평칭에 올렸을 때 대부분 가로장은 애잔함 쪽으로 기울 것이다. 자식을 올려보면 어떨까? 더 많은 사람들의 가로장이 애잔함 쪽으로 기울 것이다. 반면 우리 주위에는 밉상도 참 많다. 특히 직장에는 미움 쪽으로 가로장이 확 기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다행히 감정의 천평칭은 변덕을 부리기도 한다. 학씨와 소설 속 악인들의 가로장은 처음에는 미움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었다. 그런데 드라마와 소설이 끝날 무렵 가로장은 놀랍게도 균형을 이룬다. 어떻게 그 포근한 변덕이 가능했을까? 그들의 겉만을 보여주던 드라마와 소설이 그들의 속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공간이 확장되고 우리는 그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다.
변곡점이라는 게 있다. 단지 한 방울일 뿐인데 그 한 방울이 더해져 둑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고, 단지 쌀 한 되를 더 올렸을 뿐인데 억센 지게꾼의 무릎이 턱 꺾이는 순간이 있다. 변곡점이 변덕의 시작이다.
아들이 중학생일 때 나와 근 두 달간 말을 안 한 적이 있다. 아들은 방문을 닫고 나와의 대면을 거부했다. 나는 아들이 하는 말이, 행동이 모두 못마땅했고 아들은 그런 나를 원망했다. 2박 3일의 회사 연수 동안 나는 강의를 듣지 않고 사흘 내내 아들과의 화해만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현관 문소리가 들리자, 거실에 있던 아들은 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꽉 잠그고. 내가 아들 방을 노크하자 아내와 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잠깐만 문 열어. 한마디만 할게.” 아들이 문을 열고 내 앞에 섰다. 두 달 만에 보는 아들이었다. 나는 약속을 어겼다. 아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들을 그냥 껴안았다.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잠시 후 아들이 내 품에서 펑펑 울었다. 나도 눈물이 왈칵 났고 아내와 딸도 옆에서 소리 내 울었다. 둑은 그렇게 무너졌고 억센 지게꾼은 그렇게 무릎을 꿇었다.
요즘은 아들이 나를 애잔한 눈으로 바라본다. 오늘 무슨 운동을 얼마나 했냐고 수시로 잔소리를 해댄다. 내가 저한테 했던 잔소리의 두 배가 넘게. 그런데 그게 싫지 않다.
드라마와 소설 속에서만 변곡점과 변덕을 만날 수 있을까? 속을 보여주며 공간을 확장하려는 타인에게 혹시 지금 고집스럽게 눈과 마음의 문을 닫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의 학씨를 한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 저녁 산책길에, 내가 공연히 미움 속에 가둬버린 학씨의 애잔한 끝자락이 슬쩍 보일지도 모른다.
-26회 무영신인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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