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완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부소장

▲ 맹주완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부소장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그는 눈을 뜬다. 침구류를 정리하고 간밤에 읽다 잠든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는다. 양치를 하고 수염을 다듬고 분무기로 베란다 화초에 물을 뿌린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자동차 열쇠 등 소지품을 챙기고 현관문을 나선다. 주차장 옆 자판기에서 시원한 캔 음료를 하나 뽑아들고 승합차에 올라 음료를 마시고 시동을 건다. 낡은 차량 카세트테이프에선 올드 팝이 흘러나오고 그는 한산한 도시의 아침거리를 달린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원의 공중화장실이다. 허리에 무거운 열쇠꾸러미를 차고 청소용품을 챙겨서 화장실을 청소한다. 여기저기 버려진 담배꽁초와 휴지들을 줍고 변기의 보이지 않은 곳까지 손거울을 비춰가며 청소한다. 화장실 이용객이 들어오면 잠시 일손을 멈추고 밖으로 나와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공중화장실을 옮겨갈 때마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열쇠꾸러미는 출렁거린다. 점심때가 되면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로 허기를 달래고 필름이 들어있는 구식 사진기로 무성한 나무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찍는다. 화장실 손잡이까지 깨끗하게 닦아내며 청소 일을 마친 뒤에는 분주한 도시를 뒤로하고 좀 이른 퇴근을 한다. 공원에서 옮겨온 어린 나무를 화분에 심어 물을 주고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공중목욕탕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목욕을 마치고 단골식당에 들러 간소한 안주와 술 한 잔을 음미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 슬며시 잠이 든다. 아 그에게 밤은 짧다. 창문을 통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리는 빗자루 질에 잠을 깬 그는 침구류를 정리하고 어제와 같은 일들을 순서대로 진행하며 하루를 맞이한다. 다만 카세트테이프 선곡에 차이와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라는 것 말고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중 화장실 청소에 열중한다. 마찬가지로 음악을 들으며 귀가하고,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 빨래방 그리고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하고, 단골술집을 방문하고 사진관에 가서 필름을 구입하고 인화한 사진을 찾아 분류한다. 그는 단골술집의 여주인도 인정하는 ‘지적인 사람’이다. 그의 하루는 아주 소소하다.
그 날은 종강일이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즉 주머니 속에 송곳이란 말이 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숨어있어도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게 된다.”는 말로 한 학기 강의를 마치고 학교 주변에서 짜장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가벼운 점심은 지인들과 멋진 저녁이 예정되었기에 의도된 선택이었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부고를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선택의 여지없이 약속됐던 저녁은 미뤄지고 또 다른 지인들 넷을 태우고 인천 장례식장으로 차를 몰았다. 퇴근시간이 겹쳐서 교통체증은 심각했고 예정시간보다 아주 늦게 상가집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상주를 위로하며 밥에다 술도 한잔씩 걸쳤고 자정쯤 장례식장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초행길이고 낯설긴 했지만 차량 흐름은 원활했다. 그런데 술도 별로 마시지 않은 일행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고 중얼거렸다. 처음엔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뭔 소리여, 형 좀 재워!”라고 일제히 핀잔을 주었다. 이렇듯이 계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겁고 엄중하며 두려운 단어였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맑은 정신으로 귀가할 수 없었다.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을 찾아 날이 샐 때까지 TV생중계를 지켜봤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국회에서 시민들과 몸싸움을 하는 상황, 운동장으로 병력을 실은 군 헬기가 착륙하고,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군인들이 국회건물의 유리창을 부수며 침투하는 장면, 이 모든 상황을 중계하는 당황한 기자들의 모습, 평상시에 그토록 결기 있고 당당해 보이던 정치인들의 혼란스런 모습 등, 이 모든 상황을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소소한 하루의 삶이 위협받게 되면 이성은 지치고 성찰은 멈추고 전쟁 같은 나날이 펼쳐지리라. (이글은 영화 <퍼펙트 데이>의 도움을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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