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동네 어귀가 휑하다.
담장 틈새로 삐죽이 내민 영산홍 꽃가지 옆으로 책방이 떠나며 남긴 책장 두어 개의 몰골이 비에 젖어 처연하다.
달포 가량 우리 마을에 진(珍) 풍경이 펼쳐졌었다.
아파트가 밀집되어있는 동네 들머리에 어느 아침, 서너 개의 책장이 난달에 놓였었다. 집안 서재에서나 있음 직한 책장이 가름막 하나 없는 담장을 따라 세워졌고 책더미가 수북이 쌓였다. 처음엔 어느 집 이삿짐을 옮기며 폐지를 모아 놓은 것인 줄 알았다. 책더미 옆에서 분주한 남자의 모습으로 보아 잠깐 부려놓은 짐들을 분류하는 손놀림이거니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다음 날 아침, 그곳을 지나는데 진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나절까지만 해도 두어 개쯤 되던 책장이 밤새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예닐곱 개로 늘어나 담장을 따라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어느 서재를 옮겨 놓은 것처럼.
길거리에서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을 보자 가슴이 뛰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길모퉁이 책방, 무조건 천 원”이라 써진 누런 골판지와 찌그러진 주전자에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있는 걸 보고 헌책을 파는 노점임을 알았다.
그 모퉁이는 좀 넓은 편으로 가끔 과일과 야채 난전이 서긴 했지만 책을 파는 노점은 어쩐지 낯설었다. 어수선한 책 무더기와 책장을 부산하게 오가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지극히 순박해 보이는 남자가 책방 주인인 듯싶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니 족히 십여 년 이상은 묵은 서적들이다.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나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작품도 아닌데 누가 이런 해묵은 책들을 돈 주고 살까. 하루 품삯이나 건질 수 있을까 하는 얍삽한 계산을 머리로 했다.
책을 정리하던 남자가 다가오며 아는체하려는 낌새가 보여 얼른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천 원을 주전자에 넣었다.
어느 골방에 처박혔다가 나왔는지 먼지와 함께 누렇게 바랜 <조세희 작,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소설책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들어왔다. 퀴퀴한 종이 냄새는 반백년이 지나 아득하게 침잠돼있던 여고시절 기억들을 소환하더니 급기야 그때의 감성들까지 꿈틀대며 자맥질을 해대는 건 또 무슨 조홧속인가.
나는 여고를 입학하며 집을 떠나 대처인 청주 친지 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친지 댁은 그 동네에서도 눈에 띌 만큼 큰 이층 양옥집이었다. 이층에는 삼면을 책으로 가득 채운 큰 서재인 다락방이 있었다.
내가 아는 다락방은 대체로 좁고 어두컴컴하며 허접한 세간살이들을 쟁여 놓는 곳이 건만 넓고 환하던 서재를 무슨 연유로 나는 다락방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던 나는 처음으로 떠나온 엄마 품과 고향 집이 그리울 때마다 이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방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가 우리 집 안방 냄새와 닮은 것 같아 외로움을 달래주는 나만의 아늑한 아지트라 여겼다.
그 다락방에서 책을 읽을 적마다 작품 속으로 빠져드는 감성놀이는 괴리감으로 피폐해지던 심성에 아침 이슬처럼 고요하게 스미어 차분해지게 했다.
다락방의 책에서 박완서와 피천득의 수필을 만났을 때 여린 내 가슴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짜릿한 행복에 전율했었다.
다락방의 소녀는 노천명, 강은교 시인의 시어를 되뇌고 읊조리며 여고시절 삼 년 동안 말랑한 감수성을 그곳에서 키웠다.
다락방에서 꽃잎 같은 야들야들한 감성을 키우던 그 소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책 한 권의 가치 앞에서 너무도 해맑아 숙맥 같던 남자의 상술과 순익을 저울질하던 사람이 그때 그 다락방의 소녀의 감성을 기억이나 할까.
세속에 무디어져 무덤덤하게 살고 있는 초로의 여인은 비를 맞고 있는 책장에게 속물근성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영산홍 꽃빛으로 물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