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웅 농협청주시지부 국장
청주의 봄은 무심천에서 시작된다. 벚꽃이 마지막 인사를 고하면, 시내 곳곳 가로수에 하얀 이팝나무 꽃이 피어난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길 위에 하얀 쌀을 흩뿌린 듯, 고요하고도 풍성한 빛이 거리를 덮는다. 이팝나무, 본디 ‘이밥나무’였다.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기던 시절, 쌀밥은 더없는 사치였고, 한 그릇의 하얀 밥은 작은 축제였다. 하얀 꽃송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그리운 쌀밥을 떠올렸고, 그 기억이 나무의 이름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이팝나무'로 발음은 변했지만, 꽃 속에 담긴 소망만큼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청주는 이팝나무만으로 봄을 노래하는 도시가 아니다.
옛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견된 1만5000년 전의 볍씨는 인류가 벼를 재배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 작은 씨앗은, 이 땅이 인류 최초의 농경과 쌀밥 문화를 품었던 곳임을 조용히 증명한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청주시는 시 로고를 소로리 볍씨 모양으로 정했다.
벼농사와 쌀의 기원을 상징하는 도시로서 청주의 정체성을 온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청주시 미원면(米院面)과 미평동(米坪洞) 같은 지명에 '쌀 미(米)' 자가 남아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쌀과 함께 살아온 이 땅의 기억이, 지명 곳곳에 숨 쉬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식탁은 달라지고 있다. 아침밥은 사라지고, 빵과 커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논은 여전히 푸르건만, 밥상은 점점 쌀의 향기를 잃어간다.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은 뜻밖이었다. 기후 변화와 농가 감소로 쌀이 부족해진 일본은, 한국산 쌀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남 옥천농협의 '땅끝햇살' 쌀이 일본 시장에 진출하여, 첫 2톤이 빠르게 완판되고 추가 수출도 이어졌다.
일본 소비자들은 외쳤다. "カンコクのコメは最高だ!"(칸코쿠노 고메와 사이코우다, "한국 쌀이 최고다.")
평소 쌀 품질만큼은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일본이, 한국 쌀 앞에서 감탄했다.한국 쌀은 여전히 세상을 감동시킬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쌀이 아니라, 쌀을 잊어가는 우리의 기억이었다.농협이 외쳐온 '아침밥 먹기 운동'은 단순한 식습관 개선 캠페인이 아니다. 땅을 잇고, 삶을 이어가는 가장 오래된 약속을 되살리자는 호소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주는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박하지만 묵직한 그 한 끼는, 오늘을 견디게 하고 내일을 이끄는 에너지다. 지금 청주의 거리에는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고 있다.
꽃은 피고 지지만, 땅의 숨결과 농부의 땀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한 그릇 쌀밥을 대하는 태도가 변할 때, 우리 식탁도, 삶도, 이 땅의 미래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혹여 오늘도 바쁜 일상 속에 아침을 건너뛰었다면 이팝나무 아래서 조용히 다짐해보자.
"내일 아침은, 쌀밥으로 시작하겠다." 그리고 따뜻한 흰밥 한 그릇을 마주할 때, 마음속으로 조용히 새기자. "이 밥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