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
누군가는 말한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고. 그 무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는 어른으로서 교육을 다 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지 못한 무게를 후대의 젊은이들은 지고 가라 한다. 당신이 이루지 못한 염원을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고 이루라 한다. 당신의 염원이 후대의 염원이겠는가. 어머니의 소망이 내 소망이겠는가.
지인이 보내준 오늘의 편지에서 ‘눈물 나도록 살라’는 글을 읽었다. 게으른 내 변명이겠으나 그런 글이 나를 부담스럽게 한다. 물론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글임에 틀림은 없다. 그러나 왠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느낌이다.
내 어린 날의 대부분은 부모님의 맞춤형 나날이었다. 자율성이 사라지고 부모님이 짠 틀에 맞춰 움직여지는 날들과 부모님의 장래 희망이 내 장래 희망처럼 되어 버렸었다. 누구나 가장 많이 듣고 산 말이‘공부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촌음을 아껴야 한다는 말씀, 잠을 아껴야 한다는 말씀, 몽당연필도 아껴 쓰라는 말씀 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부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럼 사람들은 나를 향해 ‘출세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부모님 말씀 따라 책상 앞에는 앉아 있으되 책은 보지 않았으며 눈은 뜨고 있으되 글자를 읽지 않았으며 결코 촌음 같은 것은 아낀 적이 없으니 출세했냐고는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내가 촌음을 아껴 만화책과 삼류 소설책을 봤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아실까. 공무원이 되라는 어머니의 꿈이 결코 내 꿈은 아니었다는 것도 아셨을까.
알베르토 카뮈는 하루하루를 눈물 나도록 살라고 했다.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수억의 인간에게 최선이 같을 리는 없다. 최선이 누구에게나 최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언니에게 최적은 열심히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을 것이고, 나에게 최적은 좀 더 많은 소설을 읽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매일의 삶이 마지막 날이라고 치열하게, 가치 있게, 의미 있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숨이 막히는 일이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며 살고 싶다. 비 오는 날이면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 TV도 보고, 어제 먹던 팝콘도 먹고, 식은 커피도 마시고 싶다. 오래 연락이 없었던 친구와 한나절 수다도 떨고 싶다. 주말엔 종일 영화를 보고싶다. 가끔 값나가는 옷도 사고 명품백도 사고 싶다. 파닥파닥 몸 잰 제비처럼 살기보다는 미련하게 썩은 이엉 속을 뒹구는 굼벵이가 내게는 맞는 것 같은데 어머니의 끈질긴 잔소리가 그나마 사람처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 계절 멍하니 꿈을 꾸고 싶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좀 내려놓고 싶어서다. 최선의 삶을 산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이 나이쯤 되면 지친다. 더는 나를 채찍질하며 전투하듯 살아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 하루하루 눈물처럼 살라는 말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로 살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이에게 최선이 최적은 아니다. 최선은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고, 최적은 가장 적당하거나 적합한 것이다. 나는 내게 맞는 최적의 삶을 살고 싶다. 내 후손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가난한 어머니의 소원처럼 이팝꽃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팝나무는 저 풍성한 꽃을 피우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나 보다. 일 년에 열흘, 그 찬란한 날을 위해 쉬지 않고 햇빛과 바람과 비를 끌어모았을 것이다. 고단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