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세복 시인

▲배세복 시인
▲배세복 시인

필자의 첫 발령지는 실업계 고등학교였다. 일반 과목 교사로서 제법 어려운 임용 시험을 통과하고 공업고등학교로 발령이 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첫 출근 전에 많은 걱정이 앞섰다. 학생들이 거칠어서 대들면 어떡하지. 실업계 학생들에게는 국어 교과가 재미없을 텐데 어떻게 가르칠까. 내가 담임을 맡을 우리 반 학생들은 어떨까. 많은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특히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춘기를 갓 지나, 무서운 것 없이 거칠 게 뻔한 학생들이었다. 경력이 없는 나를 무시하고 대들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막상 한 달쯤 지나고 나서 실업계 학교 학생들의 일반적 특징은 ‘거칠다’가 아닌 ‘무기력하다’였다. 물론 적극적인 학생도 있었고, 자신이 배우려는 공업 분야에 애착이 많은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기력함 속에서 필자는 부르르 떠오르기도 하고 한없이 착 가라앉기도 하였다. 아니, 그들과 함께 가라앉을 때가 훨씬 많았다. 더 나아가서 수업 시간의 무기력함보다도 훨씬 지도하기 힘든 것은 담임 학급 지도였다. 무언가 유인물을 나눠주면 회수율은 30명 중에서 5명 정도의 회수율이었다. 무조건 까먹었다고. 내일 가져오겠다고. 한 번만 봐 달라고. 또다시 내일 가져오겠다고.

그런데 그것보다 필자를 힘들게 한 것은 출결이었다. 많은 학생이 결석과 지각을 반복하였다. 그중에 한 학생이 있었다. 지각을 자주 했다. 이혼 결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외지에서 일하셨다. 집에는 할머니만 있었다. 거의 3교시가 끝날 때쯤 등교하였다.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그러나 귀가 어두우셔서 정상적인 통화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학생을 지도하기로 다짐하였다. 처음에는 필자가 모닝콜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받는 사람이 받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다시 남겨서 상담하거나 지각을 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았다. 안 그래도 학교가 싫은 학생에게 그것이 곤욕이었나 보다. 고쳐지지 않는 습관 때문에 남는 시간은 길어지고 담임의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지각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 결석이 늘었다. 가끔 학생이 나오는 날, 필자는 학생을 어르기도 했지만 결국 목소리는 커지고 눈은 부릅뜨게 되었다. 아마, 학생은 싫었으리라. 그 모습을 보려고 학교에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가정 방문도 갔었다. 그러나 결국 결석일 수가 늘어난 학생은 퇴학하게 되었다. 한 달쯤 지난 후 나중에 들으셨는지, 어머니가 오셨다. 한 손에 음료수를 사 들고. 죄송했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고. 결국 자퇴를 하게 한 원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필자에게 연신 꾸벅거리셨다. 계속 만류하는데도 음료수를 두고 가셨다. 지금도 그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간이 흘러 5년 만에 그 학교를 떠나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송별식에서 그동안 정들었던 선생님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와서 밤늦게 잠들었다. 꿈이었다. 그 학생이었다. 장소는 필자의 방이 아니라 학교 앞 버스정류장이었다. 꿈속에서도 그 학생은 자퇴한 뒤였다. 그런데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은 아주 낡아서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필자는 하고많은 말 중에 왜 그랬는지 이 말을 대뜸 물었다. ‘너 왜 교복 입고 있어?’ 그가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이 옷밖에 없어요.’ 필자는 꿈속에서 허둥댔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가 안 보일 때까지 교문 담벼락 쪽으로 가서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리고 꿈에서 깨었다.

이제 다섯 번째 학교다. 송별식 날마다 첫 학교가 떠오르고, 그리고 그 학생이 떠오른다. 이제 그는 나를 만나더라도 선생으로 부르지 않겠지, 다행히. 지난주에 스승의 날이 있었다. 송별식 날이 아니었는데도 그 학생이 떠올랐다.

그리고 종일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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