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윤 수필가

▲이호윤 수필가
▲이호윤 수필가

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겨울이었다. 어수선한 시국에 봄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 같다. 소속된 문학단체마다 제각기 문학기행을 앞두고 있길래 죄다 신청했다. 기행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비록 다시 돌아와야 할 길이지만.

그날의 여행지는 경북 예천이었다. 5월인데도 며칠째 하늘은 어둡고 냉랭한 기운이 감돌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비상하는 용처럼 350°로 휘돌아 나가는 회룡포에서 여행은 시작되었다.

일정상 전망대에 올라 육지 속의 섬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과 강에서는 보기 드문 백사장을 걸어 마을을 둘러보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데다 무릎이 불편하기도 해서 산길보다는 강변길을 선택했다. 강변길을 걸으려면 섬 같은 마을을 잇는 일명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노후화된 외나무다리 대신 구멍이 숭숭 뚫린 철 발판과 강관(鋼管)으로 다리를 놓았다는데 다소 허술해 보이긴 해도 어쩐지 정감이 갔다.

원래는 다리를 건널 때 구멍 사이로 강물이 퐁퐁 차올라 퐁퐁다리라 불렀던 것이 방송국의 실수로 뿅뿅다리로 소개되는 바람에 그리되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다리를 건너다 말고 허리 숙여 뚫린 구멍으로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수심이 깊지 않아 무섭진 않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가 와서인지 강물은 깨끗했다. 산도 강도 고즈넉이 서로 조화로운 모습이 아름다워 섣불리 떠들고 싶지 않았다.

회룡포 마을 길을 걸어 들어가 보니 너른 꽃밭이 나왔다. 유채꽃이 유명하다던데 이미 지고 없고 빨간 양귀비가 한들거리며 유혹하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 그 고운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녀도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쩌라는 거니. 나도 바람에 비를 맞고 있는 것을. 문우들의 성화에 짐짓 명랑한 체 사진을 찍었다. 점점 흥겨워지는 분위기에 비에 젖듯 스며들었다.

비를 머금어 더욱 파릇한 청보리밭을 지나 오래된 돌담길을 지나 우리는 계속 걸었다. 여기저기 관광객을 손짓하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 봄을 닮은 선명한 핑크빛 대문 위에 ‘회룡포의 봄’이라 쓰인 글자를 이은 리본이 나부끼고 있다. 어쩐 일인지 리본 끝이 끊어져 있어 문우는 ‘봄’이라는 글자를 붙들어 쥐고서 포즈를 취한다. ‘봄’을 손에 쥐었건만, 머리 위엔 하얀 눈이 소복하다. 그의 손에서 ‘봄’을 받아 쥐려는데 순간 리본이 하늘로 훨훨 솟아오른다. 바람이 훼방을 놓는 것이다. 그래. 가려무나. 어차피 내가 잡을 수 있는 봄은 아니니. 잡혀 있다면 더 이상 가슴 뛰는 봄은 아닐 테지. 문득 나는 깔깔 웃어버렸다. 왠지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온종일 꿈속을 걸었는지도 몰랐다. 꿈속에서 나는 봄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점심을 먹고 들른 주막에서 우리는 파전을 반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삼강나루에 위치하여 삼강주막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마지막 주막이라고도 했다. 나루터를 오갔던 보부상과 나그네들의 쉼터가 고적하다. 우리도 잠시 나그네가 되었다. 아니 원래 나그네였던가. 술잔이 몇 번 부딪혔을 뿐인데 마음이 풀어졌다. 새큼한 막걸리의 주향(酒香)이 코를 찔러도 소용이 없다. 어쩌지 못하는 일에 애달아하지 말자. 강물이 머무는 곳, 가는 곳은 달라도 한가지로 낙동강의 지류가 아닌가. 강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기로 한다.
나의 봄은 꿈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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