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권력은 힘이다. 이 힘은 적절하게 제어되지 않으면 늘 넘치기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는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보편성을 지닌다. 힘을 제어하는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제적인 제어장치를 마련해서 그 범위 안에 가두어 놓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있는 양심과 도덕을 활용하여 스스로 넘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강제적인 제어장치를 활용하는 방법은 다시 둘로 나뉜다. 법이라는 테두리를 정해두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다른 힘으로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후자는 적절한 상황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각자 갖고 있는 힘의 크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늘 새로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일정한 크기의 사회를 형성한 이후부터 법에 의존하여 힘을 통제하는 방법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 고조선의 팔조법금과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그 고전적인 예이다.
당선이 유력한 한 대통령 후보의 선거법 위반 판결의 과정과 결과를 놓고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사법부가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처사라고 비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입법 권력이 사법부를 겁박하여 삼권분립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각각의 입장을 과도하게 대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근대 이후 등장한 시민사회는 법을 다루는 기관을 대체로 셋으로 나누어 상호 견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입법부와 그 법을 토대로 하는 정책 영역을 담당하는 행정부, 법의 정당한 집행을 감시하는 사법부가 그 셋이다. 그런데 우리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경우에는 삼권분립을 전제로 하면서도 행정부 대표인 대통령이 사법부 대표까지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다. 입법부만은 자체적으로 국회의장을 선출할 수 있고, 사법부 대표 임명에 관한 동의권과 행정부의 국무총리 임명 과정의 동의권으로 견제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 헌법체제에서 사법부의 독립성과 법관의 전문성을 존중해주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입법부에 법관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이 영역에서도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통해야 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번 반헌법적인 비상계엄 사태를 함께 겪으면서 판사들이 정말로 헌법과 법튤, 자신들의 양심에만 근거해서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에 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 판사가 예상치 못한 셈법으로 구속된 대통령을 석방하고, 대법원이 유력 대통령 후보의 최종심을 빠르게 진행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두 경우 모두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라고 강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의구심을 온전히 떨치지 못하는 데는 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도덕과 양심의 영역에서 찜찜함을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그런 찜찜함을 ‘도덕적 당혹감’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분명한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우리의 상식과 양심에 거스르는 듯한 느낌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당혹감은 올바른 판단과 관련된 것임과 동시에 우리의 균형감각을 건드리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대립하고 있는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한발 물러서서 이 상황을 먼저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바로 도덕과 양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과 양심은 강제력이 없어 힘이 약하고 쉽게 무시될 수 있고, 복잡해진 사회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 지금이 법과 권력만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인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는 권력과 그것을 제어하는 법률에 앞서 양심과 도덕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권력과 법률의 올바른 작동을 감시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