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상추가 살아났다. 엊저녁 나절 차가운 물 한 바가지 먹이고 아침에 보니 당당한 기상으로 꼿꼿하게 대를 세웠다.
얼마 전 봄이 무르익어갈 무렵, 자투리땅에 이랑 서너 골을 만들어 몇 가지 채소를 심었다. 채소를 심으면서 우리 집 식재료로 쓸 요량보다는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화초처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기실 더 컸다. 그날부터 아침이면 남새밭으로 달려가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의 낙이 됐다. 하룻밤 지나면 상추 한 잎이 늘어나고 고추에 하얀 꽃망울이 앙증맞게 매달린 것을 볼 때면 지난날 오밀조밀 세 딸을 키우며 성장 변화에 가슴 떨려오던 그때처럼 경이롭다.
반면 성급한 더위 탓인지 한낮이면 상추 잎사귀가 축 늘어지기도 한다. 고추나 가지, 토마토는 그래도 쨍하는 햇살에도 잘 버티는데 상추 몇 포기는 힘아리가 없어 보여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다.
불현듯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가 생각났다.
난(蘭) 화분 하나를 절간에 들이고 오나가나 마음 쓰이던 스님의 절실한 심정을 나도 격하게 헤아릴 것 같다. 겨우 채소 몇 포기를 키우며 신새벽이면 습관처럼 날씨를 검색하고 물 주기에 종종걸음치는 내게도 채마들은 과연 올가미일까.
힘없이 늘어져 속을 태우다가도 시원한 물 한바가지에 푸른 결로 싱그럽게 소생하는 상추를 보며 며칠 전 나를 떠올렸다.
얼마 전 낯선 나와 며칠을 마주해야 했다. 사지가 무기력해지고 땡볕 아래 상추잎처럼 철퍼덕하니 널브러지는 날들이 수일 동안 반복됐다. 시도 때도 없이 뒤섞이던 감정들이 얼굴에 각양각색의 빛으로 드러나고 굴레 안에 사지가 묶여있는 듯 불안감에 가슴은 쿵쾅댔다. 그러다가도 이유 없는 허무가 밀려오고 속절없이 작아지는 애절한 모습은 어제의 내가 결코 아니라며 거울 속의 나를 밀어내기도 했었다.
팔색조같이 변모하는 감정을 수시로 드러내는 나를 보고 누군가 던지듯 말했다. 나이 듦에 찾아오는 인생의 절기(節氣) 같은 갱년기 증세라고.
며칠 동안 그렇게 맥없이 흐느적거리던 삭신이 찬물 한 바가지 끼얹은 듯 다시 화들짝 정신을 차렸을 때, 갱년기는 더 이상 쇠퇴의 낙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월 속에서 심성이 천천히, 그러나 깊이 익어가는 고요한 성숙의 시간이었다. 몸이 화끈 달아오르던 속앓이 끝에 구태의연한 삶의 찌꺼기들이 걸러지고 나는 다시 나를 보듬으며 여린 심지가 꼿꼿하게 자리잡는 완숙의 여정이다. 그 길을 따라 세상의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리던 심지는 점점 단단해지리라.
나 어릴 적 고향 마을에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은 마을 사람들의 생명수였기에 해마다 두어 번씩 온 동리 사람들이 모여 대청소를 했다. 고인 물을 퍼내고 바닥이 드러날 즈음이면 맑게만 보이던 우물 바닥에는 나뭇가지, 낙엽 등 계절을 넘나든 잔해들과 파랗게 이끼 낀 돌멩이들까지 흥건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속을 휘저어 찌꺼기들을 퍼내며 닦아낼 때면 불순물로 그득하니 침잠돼있던 그 물은 우리가 먹던 샘물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말끔히 청소를 마친 우물은 그저 몇 시간만 지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맑고 투명하게 찰랑거렸다.
살다 보면 마음 한켠에 찌꺼기처럼 쌓여가는 감정과 기억들이 있게 마련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때때로 내면을 들여다보면 청소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향의 우물을 떠올린다. 고요히 바닥을 드러내고, 묵은 것을 걷어내고 나면 마음도 다시금 맑아지겠지.
오늘 저녁 밥상엔 들기름 듬뿍 넣은 강된장과 싱싱한 상추 한 소쿠리 소담하게 올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