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85년 그해 여름, 소도시 여고 교사에서 해직되었다가 다시 잡은 직장은 대전시 은행동 뒷골목의 검정고시학원이었다. 그리움이 컸던 탓일까, 칠판 앞에 다시 선다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설레었다. 그랬다. 내 양복 소매에 묻은 분필 자국만 봐도 가슴이 자르르 밀려오던 그런 세월이 실제로 있었다. 낮에는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이, 밤에는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어른들이 형광등 아래로 부나비처럼 자리를 채우던 그 시국이다. 그러다가 이차구차 사연으로 다시 서울 『동아일보』 임시직으로 몸을 바꿔탔으니 신산辛酸의 세월이다.
동아일보 신문사는 광화문에 있었고 잡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자리 잡았었다. 잡지는 『신동아』, 『여성동아』, 『과학동아』 그리고 월간 『멋』과 단행본 출판부가 있었다. 이따금 월간 『멋』의 화보를 찍으려는 여자 모델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미들은 거의 모두 175센티 이상(당시 남자 평균 키는 167센티)에 바싹 마른 몸이어서 얼핏 보면 예쁘다기보다는 ‘와, 너무 크고 길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더 것 같다. 막상 화보에 등장하면 그미들 의 생경한 외모가 모두 후리늘씬에 쭉쭉빵빵으로 변신하는 몸이 되었고.
당시 소위 야당지誌에 속했던 동아일보는 신군부 말기 정부와 크고 작게 부딪치기도 했다. 여의도 순시하는 전두환의 경호를 위해 신문사 건물에 들어온 형사들을 가로막으며 기자들 편에 섞여 티격태격 싸우던 기억도 있다. 86년 건국대 애학투 사태로 1000여 명 넘는 학생들이 연행될 때는 어금니 깨물며 최루탄 사이로 뛰어다녔다. 87년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학생이 물고문으로 사망을 했을 때는 모두 검은 리본을 달며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주먹을 쥐기도 했다.
기자들은 수시로 내 소맷자락 끌고 호프집으로 데려간 다음.
자기네 숙소에 데려가 재워주곤 했다. 그 동가식서가숙의 연장으로 송년을 보내던 그해 겨울에 윤재걸 선배를 만났다. 신군부 말기 그 음험한 시국, 그는 『신동아』에서 후배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인기 선배 기자였다. 86년 5월이었던가, 그가 작성한 광주항쟁의 기록이 『신동아』에 실리면서 그달에만 50만 부 가량 판매되었으니 월간지로선 신기록이다.
그의 운전대에 몸을 맡기고 또 아파트 술상을 벌인 다음 떡이 되어 쓰러졌던 것 같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면 따뜻한 밥상으로 곱창을 채우고 다시 출근을 했었다. 그는 활화산처럼 타올랐고 더러는 익은배처럼 아삭아삭 따뜻했다. 그가 쓴 르뽀 『화려한 휴가』는 20만 부가 팔렸으며 영화로도 나왔다. 그 후 나는 복직을 했고 소도시에 살면서 이따금 그의 소식을 들었다. 서경원 의원 방북 사태 때 불고지죄로 또 끌려갔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만나면서 두근두근 심장을 다독였다.
수십 년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렀고.
정년퇴임을 마친 나는 작가촌 여기저기로 옮기는 방랑자의 생활이 체질에 딱 맞았다. 주로 강원도와 남도 지방을 돌아다니는데.....재작년 진도 ‘시에그린’으로 찾아온 송기원 윤재걸 두 선배님을 맞이하면서 모처럼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낙조 아래에서 쏘주잔도 부딪치면서 몇 차례 더 만나다가 1년 후 송기원 형님이 먼저 떠났으나 아프고 놀라운 일이다. 이제 윤재걸 선배님 혼자 서울의 병원 치료와 해남의 숙소 생활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중이란다. 그때 울던 갓난아기는 어느새 나이 40이 넘은 문화부 기자가 되었고.
‘봄을 넘기기 전에 꼭 만나야지.’
해남까지 달려가 마침내 그를 만났다. 벗 송기원 형님을 보내고 천상 솔로가 된 그의 쓸쓸한 눈빛을 만나는 찰나 내 가슴이 싸-하게 시려서 말문이 막혔다. 등이 굽고 키가 줄었으니 이제 건강에 대한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할 때이다. 특히 유신과 신군부 정권 시절 지하실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노후에 나타난 것이다. 지팡이로 배웅나오는 그의 뒷모습을 우울히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남도의 길목으로 저녁놀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승용차 유리로 쏟아지는 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