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지난 해 말,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0%를 넘어섰다. 국민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유엔이 정한 ‘고령화사회(7%)’가 2000년에 시작된 이래 불과 17년만에 ‘고령사회(14%)’로 넘어갔다. 프랑스는 115년, 미국은 73년, 독일이 40년 걸린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초고속으로 고령화가 진행된 셈이다. 한 나라의 고령화 정도를 나타내는 노령화지수(Aging Index) 역시 심각하다. 유소년층(0~14세)에 비해 노년층(65세 이상)의 인구 비율은 1.99로, 노년층이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이러한 고령화의 가속화를 늦출 방책은 있는가. 현재로선 요원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는 한, 출산율 반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구 유지를 위해 필요한 출산율이 2.1명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0.7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산술적으로 감당이 어려운 수치다. 이대로 가면 머지 않아 ‘대한민국의 소멸’이라는 경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저출산은 단지 인구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생산 가능 인구의 축소와 성장률 하락은 물론, 연금 위기, 고독사, 1인 가구의 증가, 지역 공동체의 붕괴 등 사회 전반에 구조적인 충격을 가져오게 돼있다.
초고령 사회에서 노인의 삶에 대한 논의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공동의 과제가 되었다.‘노인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하다’는 말은, 노년층이 단지 ‘삶의 끝자락’에 있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함께 이끌어 갈 주체임을 선언적으로 말해준다.
노년학(Gerontology)은 노화를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재구성의 시기’로 본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다. “노년은 변화이며, 다시 쓰는 삶의 각주다.”
노화는 생물학적 변화인 동시에, 자아를 재해석하며 삶을 더욱 깊이 있게 성숙시키는 시간이다. 노인이 어떻게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첫 번째는 ‘관계의 회복’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다. 배움에 대한 열정, 적절한 공동체 활동, 친구들과의 교류는 노년의 삶을 지탱하는 사회적 면역력이다.
한편, AI와 같은 디지털 기술의 진보는 노년층에게 종종 ‘디지털 문맹’이라는 또 다른 소외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커피를 주문하는 키오스크 앞에서 망설이는 노인의 모습은 초고령 사회의 민낯이다. 노년층에 있어서 생존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디지털 포용(Digital Inclusion)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출발해야 한다.
두 번째는 ‘디톡스’다. 여기서 말하는 디톡스는 몸에 쌓인 노폐물이나 독소를 빼내는 것뿐아니라, ‘내려놓음’으로써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빈손’의 과정이다.
‘디지털디톡스‘도 중요하다. 차를 마시거나 대화 중에도,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상한 유튜브에 빠져, 그릇된 정보를 강요하거나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일관하는 모습도 볼성사납다.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 균형적 시각으로 인생을 관조하며, 삶이 농 익어 가는 소중한 시기를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결론은 명확해졌다. 초고령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복지의 영역을 넘어,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 전체의 질문이다.
지금은 70세에 유튜버가 되고, 80세에 책을 쓰며, 90세에 봉사하는 시대다. 노년은 마무리가 아니라, 다시 써 내려가는 인생의 또 다른 장이다. 노인은 더 이상 보호 대상이 아닌, 사회를 떠받치고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늙는다는 것은 단지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이 되어 가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인생의 가장 깊은 울림이 담기는 노년층의 행보에 우리 사회가 인식의 변화와 제도적 관심을 가진다면, 노년 층이 부담스러운 존재로서가 아니라, 초고령 사회를 건너가는 따뜻한 동행으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