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5천여장 사진과 함께 쟁반 밥상 담은 건강 백서 펴내
퇴직 후 할 줄 아는 게 없어 낙서라도 해 보자 글쓰기 시작
팔순 앞두고 평생 남을 위한 시간 ‘나’는 없어 “허망하더라”

▲ 이유경 충주미덕학원 기획본부장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그저 살아야 하니까 살아왔고 퇴직 후 할 일이 없어서 낙서라도 하자 한 게 글을 쓰게 됐을 뿐이에요. 이렇게 인터뷰를 할 만한 인물이 아닌데 정말 겸연쩍고 민망합니다.”

인터뷰 제안을 받고 전화선 저 너머에서 극구 손사래를 치는 듯한 느낌이 역력하다. 다섯 번의 고사 끝에 지난달 30일, 충주시 호암동 중산고 교정에서 이유경(79·사진) 충주미덕학원 기획본부장을 만났다. 미덕학원은 이 본부장의 시아버지인 중산 안동준 선생이 1965년 설립, 산하에 미덕중, 중산고, 충주상고를 두고 있다.

세월을 비껴간 듯한 외모와 작은 체구, 화려한 경력이 믿어지지 않는 차분하고 다소곳하며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가 자꾸만 눈길을 끈다.

 

그는 1946년 서울 출생으로,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부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교육대학원 재학 중 22살에 중매로 만난 남편 안건일(83·정치학 박사) 현 미덕학원 이사장과 결혼 뒤 도미, 24년간 1남 3녀의 어머니로, 유학생 또는 교수의 아내로, 메인주립대 조교(Data Entry Operator)로 살다가 1992년 귀국했다.

귀국 뒤 법인 내 세 학교 윤리교사로 12년, 학교장으로 12년 등 24년간 근무하며 건국대 교육학 석사, 충북대 교육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상, 사학육성 공로 봉황장을 수상했다.

퇴직 전후,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남매에 대한 삶의 편린들을 기록한 <내 삶 속의 소중한 인연들>(2014·삼우반), 자신의 교육이념과 학교생활을 돌아보며 쓴 교육에세이집 <희망과 설렘의 시간들>(2016·휴먼드림) 등을 펴냈다.

그리고 지난 5월 팔순을 앞두고 네 번째 저서 <우리 집 밥상 혁명>(다차원북스)을 출간했다. 책에는 외식·외출이 어려웠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비롯한 5년(2020~2025)여 간의 쟁반 밥상에 대해 5000여장이 넘는 사진과 함께 건강한 밥상을 손수 지어낸 경험과 지식을 공유했다.

 

▲이유경 박사의 네 번째 저서 '우리 집 밥상 혁명'
▲이유경 박사의 네 번째 저서 '우리 집 밥상 혁명'

이 박사는 “남편이 매일 밥상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보내주고 아이들이 그것을 모아 책을 내게 됐다”며 “그래도 딸이 지어준 부제 ‘80세 박사 할머니의 음식과 인생에 대한 단상’은 아직 (80이) 안됐는데 ‘80 노인’으로 만들어 좀 섭섭하다”고 새초롬히 웃는다.

그러다 얼핏 쓸쓸한 표정을 보이는 이 박사.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유교문화 속에서 결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60여년을 당연한 일인 듯 자연스럽게 남편과 아이들에게 밥상을 차려줬다”며 “단순한 ‘밥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정작 ‘나’는 없고, 퇴직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니 아무것도 가진 게, 할 줄 아는 게 없어 허망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 낙서라도 해보자고 시작한 게 글을 쓰는 것이었다고.

 

▲이유경 박사의 '우리 집 밥상 혁명'에는 하루 세 번, 5년여 간, 5000여장의 밥상 사진이 함께 수록돼 있다.
▲이유경 박사의 '우리 집 밥상 혁명'에는 하루 세 번, 5년여 간, 5000여장의 밥상 사진이 함께 수록돼 있다.

책을 출간한 게 얼마 안 됐지만 이 박사는 요즘 ‘디카 시(詩) 쓰기’에 빠져 있다.

몇 년 전 건국대 평생학습관에서 배운 시작(詩作) 기법을 바탕으로, 디카로 찍은 사진에 기발한 주제를 연상 짓는 그의 시적 감수성이 놀랍다.

법당 앞 자목련 몽우리에서 새 떼를 연상하기도 하고 무리 지어 피는 꽃잔디를 단체활동하는 학생들에 비유했다. 딸의 키가 더 큰 모녀 그림자 사진 위에는 ‘상전(上典)으로 키웠더니 정말 상전이 되었다’ (‘모녀의 사랑’ 중)라고 ‘폭로’했고, 매일 저녁 정확히 ‘11,111보’(시 제목) 걷기를 실행하고 있는 남편 워치 위에는 ‘너희들 아빠 일주일 운동량을 봐 보렴. 알겠니? 엄마가 힘든 이유를!’이라고 ‘탄원’했다.

공감의 웃음보가 터진다.

시집 발간은 미지수라면서도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서”라고 강조하는 그의 수줍은 듯 당당한 미소는 ‘아름다운 노년’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

▲이유경 박사 저 '내 삶 속의 소중한 인연들'(2014·삼우반)
▲이유경 박사 저 '내 삶 속의 소중한 인연들'(2014·삼우반)
▲이유경 박사 저 '희망과 설렘의 시간들'(2016·휴먼드림)
▲이유경 박사 저 '희망과 설렘의 시간들'(2016·휴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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