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오늘이 그날이다. 극한 정치적 대립에 이어 비상계엄이 터져 나왔고 급기야는 대통령이 탄핵을 거쳐 파면되는 사태에 이르렀으며, 그 총체적 난국에 마침표를 찍는 제21대 대통령선거 선거일, 2025년 6월 3일,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선거인 4,439만 명 중 1,542만 명이 사전투표에 참여해 34.74%의 사전투표율을 보여주었고, 오늘 2,900만 명 가까운 선거인이 투표에 참여해 이번 대선의 투표를 마무리하게 된다.
12·3 비상계엄에서부터 오늘 선거일까지 마치 나사못 상자를 엎질러놓은 것 같았던 그 혼돈의 6개월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미 투표를 마쳤든 아니면 오늘 투표소를 향하든, 거리낌 없고 희망에 찬 명쾌한 기표가 아니라 누구를 찍든 영 께름칙한 마음에 그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우리는 굳은 마음으로 투표소에 나가야 한다. 인공지능(AI)이 인류를 통제하지 않을까 걱정할 만큼 기술이 앞서나간다 해도 아직은 선거가 그리고 투표가 인류 보편적인 민주적 선출방식이기 때문이다.
선거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고 실천해 나갈 대리인을 선출하는 과정이다. 또한, 선거란 대의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민이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직접 그 의사를 표출하는 직접민주주의의 기본 절차로써, 일반 유권자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이며 거의 유일한 참정권의 행사라 볼 수 있다.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 등 각종 유형의 선거는 구성원과 구성원이 속해있는 조직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민주적 절차다. 따라서 투표는 소중한 권리의 표출이며 동시에 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에 선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만일 어떤 소비자가 마트의 과일코너에서 더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흠집이 덜한 사과를 골라야 한다면 정말 짜증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뭔가를 고르지 못하면 사과를 먹을 수 없으며, 더구나 그 과일코너에 진열된 과일이 흠집 난 사과뿐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사과를 골라야만 한다.
선거는 나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며, 특정인 또는 특정 그룹에 나의 미래를 위한 결정을 위임하는 절차다. 이번 대선에서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나라를 광활한 평야로 몰아갈 수 있는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능력 있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한다. 짧은 동안의 선거기간이어서 판단을 하기에 정보가 충분치는 않지만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과 이 나라가 가야 할 앞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흠집이 덜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후보들이 내걸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며 집권 청사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미래를 보는 눈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물론 험난한 지난날을 거쳐오면서 몸과 마음에 스며든 경험이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함몰되어 미래에 등을 돌린 채 모래알처럼 많은 지난날의 잘못만을 파헤치려 한다면 미래에 대한 희미한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선거를 통해 누군가를 선출했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선출된 자가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잘하고 있으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제 길에서 어긋나는 것 같으면 따가운 비판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제도가 허점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선출된 자 역시 신이 아닌 인간인지라 판단이 흐려지거나 그릇된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뽑고 잘 살피는 것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소임인 것이다.
아수라장이요 진흙탕 같은 이 나라 정치판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 정치는 언제 정신을 차릴 건가 한탄하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열린 세상에서는 정치선진국의 부러운 모습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그 좌절감은 더욱 클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대통령을 선출하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80년이다. 서구 민주국가들이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만들어가고 있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100년 안에 완성하고자 하는 욕심과 조바심과 우월감이 빚어낸 결과다.
오늘 투표소에 나가 귀중한 한 표를 던져야 우리 민주주의를 한 걸음 더 앞당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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