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시인·소설가
5월, 너는 언제나 차가운 겨울을 밀어내고, 느리게 찾아온 봄의 정점을 꽃향기로 완성한다. 네가 만든 찬란함은 모든 생명이 기다려온 약속 같고, 새싹이 꽃이 되는 순간처럼 정당하다.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너를 기다려왔다. 너로 인해 세상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고, 멈춰 있던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계절이 되니까. 너의 이름 아래 태어나는 것들은 모두 특별해진다. 막 눈을 뜬 들꽃도, 두 손으로 잡아낸 바람도, 얼굴을 스치는 햇살도 너를 통해 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단다.
사람들은 너의 품 안에서 생일을 축복하고, 새 출발을 응원하며, 잊고 지낸 기억에 물을 주기도 한단다. 너로 인해 감정은 너그러워지고, 사랑의 고백은 강물처럼 흐르게 된단다. 자연의 변화가 인간의 마음을 따라잡고, 인간의 마음은 자연 속에서 확장되어 가는 시간. 그 모든 흐름에 너는 선명히, 그리고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나는, 너의 그 찬란함이 지나간 바로 그 자리에 도착한다.
“벌써 여름인가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종종 이렇게 말하지. 그 말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그리고 어쩐지 미처 끝맺지 못한 어떤 감정이 담겨 있지. 나는 그것이 너의 영향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떠난 게 아니라, 많은 감정들을 내게 남기고 간 거란다. 그래서 나는 흔적처럼, 여운처럼, 때로는 속삭임처럼 존재하게 될 수밖에 없고, 너로 인해 햇살 아래서 걷는 산책, 먼 곳으로의 여행, 고백과 결혼과 재회의 순간들이 너의 이름 안에서 더욱 빛이 난단다.
너로 인해 사람들은 희망을 품었고, 너와 함께 다시 용기를 냈고, 너와 함께 세상에 마음을 열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꽃을 피우는 방법을 알게 됐고, 숲이 우거지게 만드는 방법을, 바람이 따뜻한 연인의 손길처럼 불게 하는 방법을 배웠단다.
너로 인해 계절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고, 감정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알게 되어, 나는 네가 남기고 간 것들을 소중히 품고 7월을 기다린단다.
내게는 벚꽃 대신 초록이 있고, 들뜬 시작 대신 무르익은 고요가 있어. 너의 사랑이 타오르는 불꽃이었다면, 나는 그 불꽃이 마음 안에 스며드는 온도란다. 설렘 대신 확신, 들뜸 대신 머뭇거림. 그런 감정들이 자리를 잡는 계절이 바로 나란다.
누군가의 사랑은 내 안에서 비로소 뿌리를 내리고, 누군가의 이별은 조용히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게 하고, 세상의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 햇살은 조금 더 길어지며, 사람들은 문득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이란다.
감정의 결이 세밀해지고, 기억의 결도 깊어지는 시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한 빛. 나는 바로 그 틈새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단다. 연둣빛이 짙은 초록으로 깊어지는 변화와 물기 머금은 바람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 그 어떤 계절보다 세심한 감각이 필요한 시간이지만 내 안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감정과, 수많은 번뇌들이 쉬임없이 움직여 땅을 단단하게 만들고, 구름은 비를 초대하게 만든단다. 그래서 네가 계절의 여왕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존재의 계절’이라 부른단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머무르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절. 네가 세상과 손을 맞잡는 시간이었다면, 나는 자기 자신과 손을 맞잡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를 그냥 지나쳐간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오겠구나.”
“장마 오기 전에 어디라도 다녀와야지.”
그런 말들이 내 귀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조금은 익명의 얼굴로 계절 속에 서 있다. 하지만 그 말들 속에서도 나는 희미한 감사를 느낀단다.
안녕! 2025년 5월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