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세종특별자치시 시장

▲ 최민호 세종시장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중략) 나는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 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과거의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나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게 하고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 온 나의 전 운명에 감사한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독립운동 애국장 훈장이 추서된 일본인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이야기다.
그녀를 기리는 찻집이 지난 6월 5일 세종시 부강면 시장1길 6번지에 문을 열었다.
‘가네코 후미코 다실’.
그녀의 남편은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으로, 남편의 성과 자신의 이름 후미코를 따 한국 이름은 ‘박문자(朴文子)’다.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입양을 통해 조선으로 오게 되고 지금의 부강에 살며 부강공립보통학교(현 부강초)를 졸업했다.
그녀의 부강에 대한 추억은 곧 조선에 대한 기억이다.
“부강에 살면서, 일본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뜻한 정을 느꼈다. 일본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그저 내버려 두는 존재였지만, 조선에서는 가난한 자들도 서로 기대어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단순한 동정이 아닌, 인간으로서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그것은 나를 조선의 현실에 눈뜨게 했다”
그녀의 옥중 수기이자 자서전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의 한 대목이다.
가네코 후미코가 독립운동에 눈을 뜬 것은 부강에서였다.
1919년 3월 31일 부강역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목격한 가네코 후미코는 자서전을 통해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라고 밝히며 조선인의 독립의지에 깊이 공감했다.
사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이 아니었으면 부강역에서 벌어졌던 만세운동을 자세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상세한 기억은 지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자료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현장 목격담으로 기록되고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4월 12일 부강을 떠났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기독교도,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는 기독교에 빠져들었지만 신앙을 가져봤자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에 실망했고,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과도 만남을 가졌지만 남은 것은 상처와 실망뿐이었다.
그러다 <청년조선>이라는 잡지에서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읽게 되고 이때의 감동을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을 이 시에서 찾은 듯한 기분”이라고 자서전에 적었다.
곧 박열과 마주한 후미코는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라며 박열의 사상에 공명하며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그와 동거를 시작했으며 박열이 조직한 모임에 가입한다.
‘불령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이 벌어진 지 3일 만에 예비검속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고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일본의 지배에 항거하는 조선인) 비밀결사 사건’으로 비화되어 1926년 3월 남편 박열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형선고를 받는 법정에서 만세를 불렀던 가네코 후미코. 이후 일본 각료회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고 우츠노미야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그해 7월 23일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일본은 후미코의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나 당시의 신문은 ‘사인불명’으로 보도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은 화장되어 박열의 고향이자 선영인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팔령리에 묻혔다.
남편인 박열은 22년 2개월간을 복역하고, 8.15 광복 후인 1945년 10월 27일이 돼서야 석방되었다. 현재 후미코는 남편인 박열 의사와 함께 박열의사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조국인 일본을 뒤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가네코 후미코. 이제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어 간다.
부강 지역민들의 따뜻한 정과 인간적인 대우를 자서전 곳곳에 새긴 가네코 후미코. 하지만 부강엔 그녀를 기념할 만한 흔적이 전무하다.
이러한 때 '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회'(회장 이규상)에서 뜻을 모아 ‘가네코 후미코 다실’을 열었다.
그곳에 앉아 그녀의 청초한 얼굴 사진을 바라본다. 23세. 꽃다운 나이, 꽃 같은 얼굴이다.
일본의 패권주의에 맞서 식민지 조선의 남자를 만나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꽃 같은 목숨을 버린 그녀의 고향 부강면에 그녀의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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