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전 시인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목적을 가지며,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들은 도구나 수단이 된다.
그는 존재들을 상 하위 계층으로 나누고 상위계층의 존재를 위해 하위 계층의 존재가 목적이 되고 수단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윤리적인 행위로써 정당화된다고 여긴다.
인간은 먹는 즐거움을 만족하기 위해 맛있는 고기를 먹고 건강을 위해 싱싱한 야채를 먹으며 조금 더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산속에 집을 짓고 관광지를 개발하여 휴식을 즐긴다.
그뿐 아니라 이를 상업화 시켜 자연을 개간, 벌목, 훼손하는 것은 문명화된 세대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인간중심적인 행위라고 합리화한다.
이런 전제에는 인간이 최고의 계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밖의 것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라는 의식과 신이 인간을 만들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배하라고 명령했다는 종교적 선민의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모든 존재를 정복하고 지배할 상위의 계층에 자리 잡고 있을까, 그 기준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에 대해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학창 시절, 시애틀이 미국에 편입되기 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시애틀 추장의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인디언 추장은 땅을 팔라는 미국의 요구에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사람이 삶의 거미줄을 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의 형제이고 어머니이며 공기와 숲과 동물들 역시 우리와 함께 대자연이라는 거미줄을 짜는 한 올 한 올의 부분이라는 그의 의식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하늘과 동물과 자연을 인간과 같은 생명으로 대하던 사상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을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고 인간이 만든 계약서와 인간이 만든 경제적 논리로 인간의 욕망을 위해 나무를 자르고, 숲을 밀어내고 땅에 농약을 뿌린 후 그 자리에 인공 잔디를 심거나 유흥시설을 만들어낸다. 내 팔이 잘려 나가고 형제의 마음이 파헤쳐지며, 같은 부족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얼마 전 농사를 업으로 삼으며 글을 쓰고 계신 홍일선 시인님의 시집 모꼬지가 고양시에 위치한 용뿔 느티나무 아래서 열렸다.
용뿔 느티나무는 무학대사가 700년 전 심은 나무라고 한다. 숨을 쉬는 듯한 나뭇잎의 흔들림, 증손자를 무등 태우 듯 온갖 새들을 가지에 태우고 그 지저귐을 허허롭게 받아내고 있는 용뿔 느티나무 아래서 100년도 살지 못한 어리고 어린 인간이란 이름의 시인들이 모여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불렀다.
봄날/ 소원하기로는/ 어진 이 눈에 띄기를/ 더 간절히 소원하옵기로는/ 가난한 이 몸속으로 들어가/ 한 끼 공양주가 되기를/ 생명이 생명을 드시는/ 이천식천 법설 깨닫기를 소원하는/ 천치 두릅 생불들/ (시 「생불들」 중에서)
그들 중에는 그 산과 용뿔 느티나무가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 사라질 뻔했을 때 온 힘을 모아 산과 용뿔 느티나무를 구해낸 시애틀의 추장과 같은 이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인간은 땅을 의지하고 하늘의 부축을 받으며 자연이 공급해 주는 혜택 덕분에 살고 있는 작고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을 모두가 다 함께 움직여 가고 있는 지체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더 늦어서 우리의 형제와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기 전에 자연과 오래도록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