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영 시인

▲ 하재영 시인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을 만날 때, 문장을 견고하게 받치고 있는 신선한 단어를 접할 때 나는 감탄하고 그것에 빨려 들어간다.

‘어쩜 이렇게 좋은 글을….’

얼마 전 내가 소속된 문학 단체에서 옥천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옥천은 청주에서 가깝기에 문학인은 물론이고 문학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두 번 들렀을 만한 곳이다.

그럼에도 굳이 옥천을 선택한 것은 회원 중 L 시인이 정지용을 연구하고, 옥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설명을 듣고 정지용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문학기행 주제도 ‘정지용 시인과 옥천 톺아보기’라고 정했다. 예전에 발간한 ’백록담‘, ’지용시선‘, ’산문‘ 등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을 서재에 꽂아 놓을 정도로 정지용 시인을 좋아하고, 십여 차례 이상 정지용 문학관을 찾았던 나로서는 혹시 뻔한 내용, 식상한 코스가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도 했다.

L 시인은 옥천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정지용 시인의 가계도와 살았던 곳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하였다. 자연스럽게 지용의 향수를 떠올렸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그야말로 명시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줄대는’, ‘얼룩배기’, ‘해설피’, ‘게으른 울음’ 등의 단어에 꽂히게 되며, 꿈엔들 잊히지 못하는 지용의 고향 산천 옥천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L시인의 강의를 들으면서 문학기행에 특별한 무언가가 내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오래전 정지용 생가를 처음 찾았을 때다. 나는 정지용 문학관 앞에 있는 실개천이 ‘향수’란 시에 등장하는 천(川)으로 그냥 인정했었다.

하지만….

옥천에 도착한 우리는 문화해설사를 만나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시간 이상 정지용 문학관, 사마소, 전통문화체험관, 향교, 육영수 여사 생가를 도보로 톺아 보았다.

정지용 생가에서였다. 해설사는 문과 문 사이에 있는 볏짚 장식을 가리키며 “이게 무엇인지 아시는 분 있으세요?” 대청마루 벽에는 여자의 댕기 머리처럼 짚으로 엮은 것이 걸려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문고리가 벽을 뚫지 못하게 예방하는 도구예요.”

우리 조상의 지혜를 발견하는 자리였다. 그것은 다음 방문지 사마소에서도 볼 수 있었다. ‘문초리’라고 했다. 사마소에서 다음 코스로 옮기며 인터넷으로 문초리를 검색했다. 명확하게 설명한 글을 찾을 수 없었다. 향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마비를 지나 명륜당 건물 양옆 특이한 형태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뜬구들입니다.”
‘뜬구들!’ 해설사의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집 구들만 생각한 내게 뜬구들은 처음 보는 시설이었다. 동행했던 일행 역시 신기한지 이쪽저쪽을 살피며 사진을 찍었다. 강의장이라 할 명륜당 마루 양쪽 허공에 구들을 놓고 겨울에 불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우리 조상의 창의적 깊은 속내를 발견하는 기쁨이 내 몸을 적셨다.

점심 식사 후 읍내를 벗어나 수북리로 이동했을 때 강의를 담당했던 L 시인이 향수의 배경이라며 손끝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 그곳에 있었다. 대청댐 수몰로 들은 쪼그라들었지만 넓은 벌이었다. 향수에 등장하는 실개천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명문장 속의 견고한 단어처럼 ‘문초리’와 ‘뜬구들’, 그리고 수북리 탐방은 문학기행의 맛을 한껏 끌어올린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시간, 그래 그게 어찌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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