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문학평론가
사랑도 듬성듬성 솎아 쓸 수 있을까.
컬러 연필 여섯 자루가 놓여있다. 애초 열두 자루였는데 반은 다 쓰고 여섯 자루만 남은 모양이다. 그 중 한 자루는 부러져 있다. 큰아들이 이사를 하며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준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로 디자인을 하니 굳이 연필이 필요 없는 눈치다. 아무래도 소중히 여기던 연필을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뚜껑을 열어보고 만져보고 닫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잘 깎여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연필보다 부러진 연필에 더 눈길이 간다.
시인은 아픔에 정직해야 한다지만, 지금, 연필도 인간도 아픔을 견디며 정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간 문자나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십 중반에 접어드는 녀석들이 찾아왔다. 모 기업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녀석이랑 모 고등학교 선생으로 재직 중인 제자 녀석 둘이 나란히 찾아왔다.
팀장 녀석은 별명이 감자다. 원래는 탄 감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감자가 되어있다. 탄 감자는 3음절이고 감자는 2음절이라 부르기가 쉽다는 이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축구를 좋아하던 녀석은 종일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그러니 햇빛에 그을려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지어준 별명이다.
어느 날 밤에 학교 옆 언덕길을 올라오는 초등학교 3학년 녀석과 마주쳤다. 그런데 얼굴이 하도 새까맣기에 웃는 얼굴에서 이빨만 보였다. 그때 깜짝 놀란 기억 때문에 탄 감자라는 별명을 지어줬었다.
아궁이에 감자를 굽다가 태우면 돌덩이처럼 새까맣게 된다. 그러면 감자를 까는 것이 아닌 깨뜨려야 한다. 그래서 조금 남은 하얀 속살만 맛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탄 감자가 얼마나 먹빛으로 새까만지…. 이 녀석은 규칙을 안 지키거나 숙제를 안 해온 적이 없다. 이러니 단 한 번도 꾸중을 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렇게 살 수가 있는 지 궁금할 정도로 바른 녀석이었다.
반갑고 기쁜 일은 뒤로하고 삼겹살에 맥주를 마셨다.
지난 이야기들이 오간다. 무심코 한 이야기들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녀석들. 그 이야기들 사이로 25여 년 전 기억이 소환되었다. 입이 커서 하마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행여 상처로 남을까 꺼내지도 못했던 기억이 남았던 녀석이기도 하다.
버릇없어 보이는 혹은 그러한 생각으로 평생을 산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회초리를 들었다. 화는 화를 불러왔다. 회초리의 강도가 세졌다. 지금은 후회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 회초리가 약이 되었던 모양이다. 될 놈은 된다고 그 녀석이 될 놈이라 그랬는지 선생님 덕분에 사람 됐다는 말을 여러 번 한다. 그리고 힘들었던 가정사도 풀어 헤친다. 풀어 헤친 이야기 속에는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임용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던 굴곡진 고통사가 포함되었다.
목울대가 울렁이고 목이 따갑다. 자칫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참았다. 애써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냥 들어주었다. 말없이,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참 고맙다.
연필을 깎는다.
향나무 향이 싫지 않다. 매끈하게 다듬고 다듬었다. 연필심도 적당히 세웠다. 그리고 종이에 사랑, 제자, 아들이라 쓰고, 동그라미, 세모 등을 그려보았다. 차이가 없다. 이들 단어는 무게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색이 다르지도 않았다. 그냥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무더위가 시작될 모양이다. 매끈하게 다듬은 연필로 써놓은 단어들에 시원한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힘들었던 시간은 씻기고 행복의 시간이 움트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