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인문칼럼니스트

▲ 유영선 인문칼럼니스트

수요일 저녁 7시. 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을 뚫고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다. 미리 신청을 받은 열다섯 명의 낯선 얼굴들이다.
30대에서부터 70대까지,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두 다른 이들은 서먹함 대신 가슴에 ‘감정 명찰’을 달고 둘러앉는다. 일상의 바쁨을 내려놓고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시와 문장을 낭독한다. 참여자가 긴장한 목소리로 시를 읽으면 공간은 숨소리조차 멈춘 듯 고요해진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눈을 감는다.
모두가 돌아가며 낭독하고, 낭독자에게 끼어들지 않으며, 낭독 후엔 감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시 한 편을 매개로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 시간. 낭독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기의 다리를 놓는 행위가 된다. 무엇이, 이들을, 이 바쁜 밤 시간대에,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감동하며 낭독회 참여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지난해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콘텐츠연구소 글그림’이 기획해 ‘릴레이 한강 문장낭독회’를 연 뒤, 올들어 충북숲갤러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저녁 일곱詩, 문장낭독회’라는 이름으로 시민낭독회를 열고 있다.
‘저녁 일곱詩, 문장낭독회’가 테마를 정해 홍보하고 미리 신청을 받는 낭독회라면, ‘수요 브런치 시낭독회’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대상으로 여는 열린 낭독회다. 지난 4월 시민과 함께 하는 ‘수요 브런치 시낭독회’를 시작했다. 청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마루낭송회’ 회원들이 주체가 되어서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청주시내의 작은 쉼터 유리피라미드 공간에서 진행한다. 회원들이 돌아가며 자유롭게 진행을 맡는데 그새 12회를 열었다.
왜 낭독인가.
낭독은 단순한 ‘소리내어 읽기’ 이상의 독서문화이다. 혼자 하는 묵독이 문자와 나의 관계라면, 모여서 하는 낭독은 사람의 체온을 건네는 일이며, 나의 마음을 타인에게 보내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다리는 때로 위로가 되고, 때로는 오래된 상처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치유의 손이 된다.
심리학자 클리퍼드 나스는 “낭독은 청자에게 정서적 일체감과 신뢰를 형성하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낭독은 들을 때 읽는 사람의 숨소리와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감정 조율, 공감 능력, 상호 존중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따라서 서로의 삶과 감정을 공명시키는 문화, 즉 ‘경청의 문화’를 회복하는 길이 되기도 하다.
해외에서는 이미 낭독을 공동체 회복의 도구로 주목하고 있다.
영국 리버풀에서 시작된 ‘더 리더(The Reader)’ 프로젝트는 지역 도서관, 요양원, 교도소, 병원 등에서 정기 낭독 모임을 운영하며, 우울증 외로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회복의 길을 제공해 왔다. ‘책을 함께 읽는 것만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임상 사례를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소리내어 읽는 모임(音讀會)’이 고령 사회에서 치매예방, 정서순화, 가족간 유대 를 위한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소리내어 책을 읽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공감하는 내적 유대야말로 최고의 연대감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통의 가치, 기억, 책임, 공간 또는 관계를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돌보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누구는 공동체를 ‘불’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과 같다고도 했다. 각자 따뜻함을 얻지만, 동시에 타인의 온기도 나누고 돌본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경청을 통해 공감을 나누는 낭독은 정서적 공동체를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말’ 의 홍수 속에 살지만, 정작 ‘듣는 것’은 서툰 시대에 살고 있다. 넘치는 뉴스와 정보들, 인공지능의 기계적인 음성에 감성이 메말라 가는 시대, 사람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낭독의 행위야말로 공동체 삶 속에서 자신을 다시 찾게 하는 소중한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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